세계일보 취재팀은 국가기록원과 국가정보원, 통일부 등 주요 국가기관을 상대로 1945∼93년 사이에 있었던 150개 주요 국가정책과 대형 사건사고의 기록물 보존 실태를 취재한 결과, 대부분의 기록이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가 제대로 검증돼 쓰여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실제로 해방 이후 발생한 주요 정치적 사건과 경제개발계획 관련문건 등 주요 정책문서들이 대부분 소실 또는 폐기됐기 때문이다.
기록물 관리와 보존에 큰 구멍이 뚫린 셈이다. 이는 국가가 기록물 관리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은 한마디로 국가 차원의 통합적인 기록물 관리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정기 문서 하나도 없다=해방 후 48년 정부 수립때까지의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미 군정과 남한 과도정부, 과도 입법의원 등에 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3년은 남북 분단,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등 현대사를 결정짓는 시기이지만 시대상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국가기록원 이승억 학예연구사는 “국가기록원에는 없고 다른 기관에도 보존 가능성이 희박해 사실상 기록이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해방후 실시한 첫 농업정책인 농지개혁 문서가 사라진 것도 어처구니없다. 농지개혁 조치는 해방 후 일제의 봉건적 지주 소유관계를 청산하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음에도 불구, 당시 정책수립 관련 문서와 보고서류 등이 전혀 없다.
◆사라진 6·29 선언문=독재정권에 항거해 들불처럼 번진 87년 민주화운동이 만들어낸 6·29 선언문을 비롯한 관련문서가 없다는 것은 국가기록 관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6·29 선언만이 아니다. 미묘한 정치적 사건 관련기록들은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최대의 정·관계 스캔들을 촉발시킨 정인숙 피살 관련서류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국가기록원의 설명이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한 73년 일본 도쿄 피랍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내란음모사건도 당시의 판결문 1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시 사건의 실체를 학술적으로 연구하거나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봉쇄된 것이다. 정치적 사건뿐만이 아니다.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형 사건·사고 기록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껍데기뿐인 정책·사건 관련기록=정부의 행정정책 기록물이 없는 것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법령공포 원안이나 인사발령 대장 등 극히 공식적인 문서를 제외하고는 실제 추진내용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즉 법령과 인사를 통해서 공무원이 실제 수행한 정책관련 기록물이 없기 때문에 과거 정부가 추진한 수많은 정책들에 대한 분석과 평가, 재활용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61∼65년 사이 경제개발계획 수립 초기 개발 방향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일부 집행문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68년 대학입시 예비고사 실시, 77년 부가가치세 신설 등 정책에 관한 서류는 당시 국무회의 안건목록에만 있을 뿐 관련서류가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검찰, 경찰에서 생산한 사건관련 서류들이 전혀 이관돼 보관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당 사건, 60년대 한일회담 반대시위 운동, 민청학련 사건 관련 일체의 신문조서들이 남아 있지 않아 사회적 논란과 분열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임기종료와 함께 통치사료 증발
1993년 이전의 통치기록 상당수가 사라졌다는 것은 무단 폐기되거나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는 얘기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수석실에서 작성한 정책관련 조사 및 검토보고서도 대부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대통령과 청와대 기록이 ‘사료’로서 갖는 의미를 감안하면 사실상 통치자들이 ‘기록 없는 나라’를 조장해 왔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운 셈이다.
◆통치사료가 증발됐다=현재 국가기록원(옛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된 역대 대통령 기록은 모두 27만8000여건. 2001년 1월 미국 아칸소주 수도 리틀락 시에 있는 임시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된 클린턴 대통령의 기록물(7680만쪽의 문서기록물과 185만장의 사진, 7만5000개의 박물)보다도 적은 양이다. 문제는 기록의 질이다.
역대 대통령이 남긴 기록은 박정희 대통령을 제외하곤 대부분 법률시행 재가문서나 시청각자료가 고작이다. 국가의 중요 정책을 추진, 결정하는 데 있어 그 배경을 알 수 있는 통치자료는 거의 없다. 대부분 임기 말에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를 폐기했기 때문이다. 취재팀의 확인 결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경우 재임 기간 정국을 뒤흔들었던 ‘국민방위군 사건(51년)’과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건(58년)’, 3·15 부정선거(60년)’등 주요 사건의 관계기관 대책협의 기록물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8개월을 재임한 최규하 전 대통령은 79년 취임 당시 ‘취임사’조차 없는 상태였다.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 기록이 얼마나 허술하게 관리돼 왔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각각 3만8521건과 3만9015건이 보관된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은 통치기록 중 유독 역사의 ‘오점’으로 평가된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닮은 꼴이다. 박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권력을 움켜잡았지만 당시 회의록은 남아 있지 않고, 장기집권의 토대를 닦았던 ‘3선 개헌’(69년)과 ‘10월유신’(72년)도 단행 배경이 적힌 문서가 남아 있지 않았다.
남다른 기록열로 유명했던 전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날 때 트럭 서너대 분량의 통치기록을 집으로 가져갔다. 이로 인해 군사독재의 상징으로 각인된 80년 당시 ‘삼청교육’과 ‘학원 정화’, ‘언론 통폐합’ 등의 추진 배경을 살필 수 있는 관련기록이 모두 사라졌다. 또 정권 창출의 기폭제였던 ‘국보위(80년)’ 관련자료도 고작 국보위 현판과 관인대장만 남아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러시아 수교와 남북합의서 교환 등 공식문서는 더러 있었으나 청와대 수석실에서 올린 보고서는 드물었다. 심지어 9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관련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관련 기록에는 대통령 비서실 재가문건이 의외로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알려진 대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사태와 관련, 사후보고서는 있었지만 발생원인 및 대책강구 등에 관한 보고서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름뿐인 통치사료 보존 규정=국가기록원은 지난해 2월에야 건국 이후 최초로 대통령 기록을 체계적으로 인수했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인수한 통치자료는 모두 15만7580건이었다. ‘대통령 기록을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해야 한다’고 규정한 ‘정부공문서 규정(87년)’이 생긴 지 16년이 흐른 뒤였다.
이는 한국현대사에서 대통령 통치사료가 사실상 개인용 기록처럼 간주돼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대통령 비서실에서 생산된 중요 기록들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유실되거나, 이 가운데 일부는 비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유통되기도 했다.
통치기록의 국가기록원 이관을 법으로 처음 규정한 공공기록물관리법(2000년 시행)의 허점도 적지 않다. 이 법 시행령 28조는 ‘차기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의 자료를 청와대에 비치·활용·선별할 권한이 있다’고 명시했다. 다시 말해 청와대 비서실에서 “놔두고 보겠다”고 하면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할 수 없는 셈이다. 김한욱 국가기록원 원장은 “과거에는 통치사료 보관 여부가 오로지 대통령의 손에 달려 있었다”며 “새로 짓는 성남서고에 들어설 대통령기록관에 전시할 기록물 수집을 위해 역대 대통령들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말했다.
특별기획취재팀=채희창·박병진·주춘렬·김형구·이우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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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주요 기록(150건) 보존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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