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에어컨’ 바람 부는 만항재
만항재에 오르며 자동차 창문을 열자 싱그럽고 상쾌한 바람이 밀려 들어온다. 후텁지근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8월 중순 서울의 공기와는 태생부터가 다른 것 같다. 만항재에 오르자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아직도 열기가 식지 않은 햇볕만 아니라면, 이곳에서는 좀처럼 여름을 체감할 수 없다. 만항재 주변에서는 1년 중 난방기구를 사용하지 않는 때가 8월 초 전후 20일 정도에 불과하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 7월 초나 8월 하순에도 새벽에는 난로가 없으면 한기를 느낀다고 한다.
고개 곳곳에는 아름드리 낙엽송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그 사이에 자리를 편 몇몇 가족들이 눈에 띈다. 유명하다는 바다와 숲을 제쳐놓고 강원도 첩첩산중의 고개로 막바지 피서를 온 사람들이다. 1330m 고개의 숲속에서 한기를 느꼈는지, 긴팔을 걸쳐 입은 아이들도 보인다. 바닷물과 계곡물이 없어도, 더위를 쫓는 데 이만 한 데가 없다. ‘천연에어컨’ 바람이 불고 있지 않은가.
요즘 만항재에는 야생화가 만발해 있다. 산책로를 따라 긴 산꼬리풀, 물양지, 구릿대 등 70여종의 야생화가 낙엽송과 어울려 멋진 자태를 뽐낸다. 이 일대에서는 12일까지 ‘함백산 야생화 축제’도 열렸다. 파란 하늘과 짙푸른 수목, 형형색색의 야생화가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그림엽서에 등장하는 알프스 산자락을 연상시킨다.
◇칠량이골에서 즐기는 천렵.(왼쪽)◇열목어가 서식하는 정암사 계곡. 이 계곡이 천연기념물이다. |
#열목어와 적멸보궁을 만나는 정암사
414번 지방도로로 이어지지만, 만항재 양쪽의 정선과 영월은 전혀 다른 풍경이다. 정선 방향 도로는 경사와 굴곡이 그다지 심하지 않다. 해발 700m인 고한읍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면 가뿐히 정상에 닿는다.
정선 쪽 만항재 고갯길 초입에서는 천년 고찰 태백산 정암사를 만난다. 절집 뒤편 언덕 위 ‘수마노탑’에 석가모니 사리가 봉안된 적멸보궁이다. 절집 밖 계류에 잠시 발을 담그고 길을 재촉하면 정상 부근에서 길이 갈라진다. 왼편 길은 태릉선수촌 태백 분촌을 거쳐 함백산 정상으로 연결되고, 오른쪽 길은 만항재로 이어진다. 절집 옆을 끼고 흐르는 정암사 계곡은 열목어 서식지로, 천연기념물 73호다. 경북 봉화군 석포면 도화동계곡(천연기념물 74호)와 더불어 세계 최남단 열목어 서식지다. 열목어가 쉽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천연기념물인 계곡이 고색창연한 적멸궁과 그 앞의 주목 등과 어우러져 정암사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태고의 신비 간직한 영월 칠량이골
만항재∼영월 코스는 비교적 온유한 정선∼만항재 코스와는 달리 180도에 가까운 굴곡이 쉼 없이 계속된다. 만항재에 서서 영월에서 구불구불 산허리를 감아돌며 올라오는 414번 도로를 내려다보면, 한참 동안 지나가는 차 한 대 없어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오른편에 백두대산의 장쾌한 능선이 펼쳐져 감탄사를 연발하며 수시로 차를 세운다. 만항재를 다 내려와 31번 국도가 지나가는 화방재(950m)에서 영월 쪽으로 방향을 틀면 9㎞에 걸쳐 길게 펼쳐진 칠량이골이라는 계곡을 만난다. 원시 비경을 간직한 곳으로, 아직 휴가철인데도 계곡 상류에서는 좀처럼 인적을 찾을 수 없다.
칠량이골 상류의 백미는 이른바 ‘이끼폭포’. 현지인도 잘 모르는 곳으로,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1㎞의 계곡 전체가 진초록 이끼로 뒤덮였고, 중간중간에 작은 폭포가 숨어 있다. 상동면 쪽으로 한참을 내려오자, 그제야 꽤 넓은 소(沼)가 나타나고 짙푸른 계류에서 천렵을 즐기는 휴가객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 광경이 너무도 평화로워, 부러운 시선으로 한참을 바라본다.
정선 정암사에서부터 만항재를 넘어 영월 칠량이골까지 쉬엄쉬엄 오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한국에서 가장 시원한 곳을 누비며 굽이굽이에 숨겨진 진경에 넋을 잃는 사이, 늦더위는 저만치 달아나고 있다.
영월·정선=글·사진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여행정보
만항재 여행은 정선군 고한을 기점으로 삼는 게 편하다. 고한에는 하이원 리조트(033-590-7800) 를 비롯해 많은 숙소와 식당이 들어서 있다. 서울에서 고한까지는 중앙고속도로 제천 나들목으로 나와 38번 국도를 탄다. 고한에서 만항재로 오르다 보면 ‘함백산 토종닭집’(033-591-5364) 등 닭백숙집이 줄지어 있다. 건물은 허름해도, 놓아서 기른 토종닭의 쫄깃한 맛을 잊지 못해 찾는 사람이 많다. 만항재에서 영월쪽으로 3㎞쯤 내려가면 ‘장산콘도’(033-378-5550)가 자리 잡고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모든 객실이 나무로 지어진 정갈한 숙소다. 창문 밖으로 백두대간의 장엄한 능선이 펼쳐져, 이곳에서 새벽을 맞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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