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과 의혹의 인생이 동력
러시아의 대문호이며 사상가인 레흐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에 관한 비평적 전기가 번역 출간됐다. 영국 학술원 회원으로 옥스퍼드대 영문학 교수를 지낸 뒤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윌슨이 쓴 이 전기는 기존의 여타 톨스토이 전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방대한 자료와 심층적 명제들을 토대로, 비판적 시각에서 톨스토이의 문학과 삶을 생생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번역자 이상룡씨는 “톨스토이 연구자나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들, 특히 톨스토이 문학세계와 인간적 내면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더할 수 없는 만족감을 줄 것”이라고 상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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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당시 러시아적 환경이 낳은 세계적인 문학가이자 사상가로 서구문학의 등불 같은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귀족 출신이면서도 농민과 어울려 살았던 인간적이고 서민적인 풍모와 더불어 충동적이고 무계획적이었던 젊은 시절, 부인과 자녀들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가정적이지 못했던 모순과 의혹의 삶이 공존했던 인생을 살았다고 저자는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불만족스런 삶이 인간과 진리를 놓고 처절하게 고민하도록 만든 계기로 작용했고, 이런 고뇌가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니나(1876)’ ‘부활(1899)’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의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어내는 동력이 됐다.
두 살 때 어머니, 여덟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보낸 불우한 청소년기와 무위도식했던 대학생활은 오히려 그를 치열한 삶의 여정으로 유도했다. 외로운 유년 시절에 느닷없이 부모가 사망하는 급격한 삶의 변화나, 반정부 사건이 연이어 터지는 혼란기를 겪으면서 톨스토이는 방황했다. 마음속 깊숙이 동경했던 프랑스를 여행하는 도중 기요틴에서 무참히 사람의 목이 떨어져나가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유럽 문화에 좌절했고 절망했다. 특히 러시아의 19세기 후반은 혼란 그 자체였다. 러시아 역사가 가장 요동치던 때에 톨스토이는 작품 활동에 몰두했고, 이런 사회상이 훗날 그의 작품 소재로 그대로 투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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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와 교류했던 동시대 문필가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톨스토이(장교복장), 그리고로비치, 오스트롭스키, 드루지닌,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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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화가 레핀이 1887년 그린 톨스토이 초상화. |
그는 러시아 출신 작가 중에서도 가장 러시아적인 특성을 지녔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의 어느 작가들보다 영국, 프랑스 작가들에게 매력을 느낀 게 사실이다. 그는 영국의 찰스 디킨스 작품에 정통했고 그의 강연을 즐겨들었다. 루소의 철학은 톨스토이 전 생애에 걸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에 관한 해석도 러시아정교의 교리나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미국의 퀘이커교나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그럼에도 톨스토이는 항상 자신이 러시아 농민의 순수한 영혼을 대변하고 있다고 자부했고,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82년의 생애를 사는 동안 그는 가까운 친척들 이외에 여타 동료들과의 교류에는 비교적 소극적이었고 전원에서만 살았다. 그런 소외된 생활과 귀족으로서의 특권은 톨스토이가 삶의 후반부에서 정부를 신랄히 비판했음에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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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톨스토이(왼쪽)와 천재 작가로 이름을 날린 막심 고리키의 젊은시절 모습. |
당대 유럽 최고의 시인이자 어휘의 달인으로 평가받았던 푸시킨에 이어 대문호 톨스토이가 등장하면서 러시아 문학은 프랑스를 능가하는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저자는 장대하고 서사시적인 러시아의 풍광과 배경은 오히려 오밀조밀하고 퇴폐적 삶에 탐닉했던 프랑스 문필가들을 압도했다고 평가했다.
정승욱 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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