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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家 사람들] LG아트센터에 나타난 '리처드 3세', 혜화동 1번지에 출현한 '쎅스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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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6-01 09:31:37 수정 : 2011-06-01 09: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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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부터 28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루마니아 연출가 가보 톰파의 [리처드 3세]에 대한 평은 양쪽으로 엇갈렸다. 무대의 색감과 연출이 이채로울 뿐 아니라 배우의 연기가 대단하다는 호평 쪽과 이해할 수 없는 헝가리언어에서 오는 이질감, 원작을 현대판 매스미디어와 정치판으로 끌고 와 원작을 모르는 관객들이 이해하기에 난해하다는 혹평이 그러했다.

기자 역시 호평과 혹평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러닝 타임 역시 160분으로 만만치 않은 인내력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청각과 시각을 자극하는 장면이 많아 지루하지않았다. 이 작품에 흥미를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2005년 국내 공연에서 배우 안석환이 표현해낸 '리처드 3세'(연극 꼽추, 리차드 3세)와 졸트 보그단이 연기하는 '리처드 3세'가 어떻게 다를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직접 감상해보니 인물에 대한 잔상은 안석환이 더 강했다. 약 6년이나 지났음에도  절뚝거리는 걸음걸이, 하이에나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불안한 눈동자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니 말이다. 반면 졸트 보그단은 조작된 매스미디어 앞에서 순진무구한 소년의 표정을 짓던 장면이 계속 떠오른다.

극단 클루지 헝가리안 씨어터의 [리처드 3세]는 장미전쟁을 전후한 15세기의 격동기 시대를 배경으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와 어린 조카를 살해하고 왕가의 여인들을 농락했을 뿐 아니라 왕관의 합법성을 위해 형 에드워드의 딸과 결혼하기 위한 음모 역시 꾸미는 실존인물을 그리고 있다.

무대는 6개의 TV영상과 마치 해부학 교실에 들어선 듯 비틀어진 몸과 머리들이 섬뜩하게 진열되어 있는 폐쇄된 공간으로 연출됐다. 밀실에서 언론조작과 살인, 마키아벨리즘 등이 일어나는 식이다. 이번 [리처드 3세] 연출의도에 대해 가보톰바가 “나는 리처드 3세에서 현대의 범죄 실험실을 창조하고 싶었다. 이 세계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바로, 대중을 조정하는 힘을 지닌 매스 미디어와 정치인들의 은밀한 공간들이다.” 라고 언급한 그대로였다.

TV영상에 먼저 나타난 인물은 곧 무대 중간 엘리베이터를 타고 등장했다.  무대 양쪽에서 캠코더로 영상 취재를 하는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중간 중간 지속적으로 들리는 '씨~익'하는 칼날이 그어지는 소리는 피비린내나는 권력 다툼을 계속적으로 상기시켰으며, 박제물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피로 물든 도살장 앞치마를 입고 그간 살해됐던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죄악의 방법은 끝이 없음을 각성시켰다.

2막에서는 잠시나마 인간과 세상에 대한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주민 역할로 등장하는 최연식 배우는 철학적인 멘트를 내뱉고 금새 사라진다. 이 때가 유일하게 자막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구린내 나는 정치판에서 벗어나 숨통을 틔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번 '리처드 3세'는 언론 조작의 귀재였다. 사실, 객석에서 가장 웃음이 많이 터졌던 때는 극단 클루지 헝가리안 씨어터에 대한 선전이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우리 연극 볼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멘트로 이 모든 게 언론 플레이였음을 관객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게 해 긴장감을 내려놓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대담한 개성을 보유한 유럽의 연극 강국, 루마니아의 연출가 가보 톰파와 그가 이끄는 클루지 헝가리안 씨어터는 2008년 프랑스 ‘오데옹 극장’,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 극장’, 독일 ‘샤우뷔네’ 등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유럽 극장들로 구성된 ‘유럽극장연합’의 일원이 되어 그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다.

영상, 휴대전화, 캠코더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보톰바 식 연출 기법을 보고나니 우리나라 연출가 윤한솔이 떠올랐다. 윤한솔 연출이 혜화동 1번지에서 올리고 있는 [나는야 쎅스왕]이 갑자기 너무도 궁금해졌다.

■ 지식탐구 나르시즘  [나는야 쎅스왕]

혜화동 1번지 5기동인 봄 페스티벌 제 3탄 [나는야 쎅스왕]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그렇다고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는 쎅스 왕의 성적인 유희가 연출되는 건 아니다.

29일 마지막 공연을 만나고 왔다. 극장 입구에서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연출가이자 작가인 윤한솔이 배우로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공연시간이 임박함에도 극장 밖에 나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늘 공연은 안하고 막을 내리기로 한 건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게다가, 표 교환하는 매표소도 없는게 아닌가? 의구심을 잠재우며 혜화동 1번지 극장 지하로 내려갔다. 더 기겁할 일이 벌어졌다. 바닥만 보고 들어가고 있었는데, 조명등이 바닥에 다 내려와 있고 극장 입구가 난장판이 돼 있었다. 아주 잠깐 '혜화동 1번지 극장이 망했구나' 하는 추론까지 했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그 안에 매표소 직원이 있고 더 안쪽으로 객석을 배치해놓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결코 평범한 연출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역시 또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극단 그린피그의 연극 [나는야 쎅스왕]은 한마디로 '섹스에 대한 지식이 넘쳐나는 연극'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 '전성현과 윤한솔의 제 멋대로 섹스 지식 탐구기'정도 되겠다. 즉, [나는야 섹스지식 대마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연극 [나는야 쎅스왕]은 프로이드의 <나르시시즘에 관한 서론>을 비롯한 나르시시즘에 관한 일련의 인문학적 텍스트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 자기성애, 성적이상, 자아이상 등의 개념에서 출발해, 해박한 성적지식과 욕구와는 달리 타인과 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연극 속에서는 '섹스를 하지 못하고, 섹스에 대한 지식을 탐닉하는 의미를 밝혀나가는 과정'이 펼쳐졌다.

관객입장에서 이번 작품은 '윤 연출가가 하고 싶은 대로 만들었구나'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윤한솔은 배우로 출연하고 있지만 배우라기 보다는 낭독자였고 탐독자였다. 함께 출연한 전성현 역시 각자 타이밍을 맞춰 대사를 치기보다는 대강의 형식만 잡고 상대의 공간을 파고드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출연진의 다소 어수룩한 표정과 대사로 인해 더더욱 여타 연극과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작품을 보기 전 '캠코더'와 윤한솔을 함께 떠올렸는데, 예감대로 이번 작품에서 윤한솔은 캠코더를 사용하고 있었다. 휴대폰 전화기에 멘트 녹음하기, 다시 듣기 역시 삽입됐다. 섹스 지식과 관련된 책을 두 배우가 번갈아가며 읽어주기도 하고 관객반응을 살펴보기도 한다. 작가가 무대 위에서 직접 관객을 만날 때 생기는 언어적 괴리에 대한 실험이기도 한다.

이때 의도된 것인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윤한솔이 보여주는 멋쩍은 웃음, 멈칫거리는 태도, 썩소가 압권이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배우들이 읽어주는 섹스 지식보다는 후반 녹음된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듣는 섹스 지식이 귀에 쏙쏙 들여박혔다는 점이다.

두 배우는 시종일관 책, 종이를 들고 부분 부분을 관객에게 읽어준다. 물론 단순한 책 읽기는 아니다. 글자를 컴퓨터 자판에 입력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캠코더를 이용해 책 속의 글자를 관객들에게 확대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캠코더 영상에 비친 글자에 펜으로 글씨를 덧입히기도 한다. 한명은 책을 읽고 또 다른 한명은 투명 아크릴판에 그 내용을 요약하거나 그림을 그려보여주기도 한다.

섹스 지식이 흘러넘치듯 바닥으로 흘러넘치는 우유, 안경테로 맛을 낸 우유잔 등 특이한 장면 역시 자리한다. 어찌보면 정신없기도 하다. 우연의 일치로 무대 앞에서 파리까지 쉴새없이 무대 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마지막은 [리처드 3세]의 주인공처럼 빛나는 왕관을 쓴 두 배우가 기타(전성현)를 치며 ‘나는야 섹스왕’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끝난다. 윤한솔은 탬버린을 들고 '재공연 의사없음' '나는야 쎅스왕' 코러스를 넣는 것으로 제 몫을 다 했다. 실험적인 작품을 올리는 혜화동 1번지에 어울리는 연극임에는 틀림없었다.

혜화동 1번지 5기동인 봄 페스티벌 제 4탄 [유년의 뜰](연출 이양구]은 6월 3일부터 12일까지 공연된다.

정다훈(공연 전문 칼럼니스트. otrcoolp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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