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리 오브 라이프’는 한 마디로 오만한 영화다. 우주와 자연과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신의 섭리를 영상으로 그려내겠다는 야심만으로도 이 영화는 참 오만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오만함은 우리에게 아주 낯설고 신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이 영화의 전반부에 나오는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기원에 관한 숭고한 대서사시는, 종교적 성찰과 철학적 사유와 시적 감각이 혼융된 이미지들로 유려하게 펼쳐진다. 우주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구의 탄생과 진화의 과정을 거쳐 20세기 중엽 미국의 한 평범한 소년(잭)에게로 이어지는 ‘생명의 역사’가 실로 장엄하게 그려진다.
이 독립적이고 거시적인 ‘생명의 역사’에 관한 거대한 장면들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영화는 매우 미시적인 시선으로 잭이라는 소년의 마음에 접근해 들어간다. 근엄하고 가부장적이며 자기모순으로 가득 찬 아버지(브래드 피트), 자애롭고 순종적인 어머니(제시카 차스테인), 그리고 순수하고 어린 동생들 사이에서 소년은 평범한 성장을 하는 듯 보이지만 선한 자들이 오히려 고통을 받는 현실에 혼란스러워 한다.
아버지의 권위적 억압에 반(反)하여 생겨나는 살부(殺父)의 충동과 어머니의 선한 삶이 가져오는 무력함, 그리고 순수하고 착했던 동생의 죽음이 만들어내는 삶의 비극성에 성인이 되어서도 잭(숀 펜)은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잭의 고통은 결국 신(神)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고뇌는 과거의 기억을 떨쳐내지 못하는 잭의 삶을 끊임없이 지배한다.
한 평범한 개인에게 투영된 삶의 괴로움은 이 영화의 전편을 지배하는 구약성서, ‘욥기’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이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의인의 고행’과 ‘악인의 번영’과 같은 인간의 삶이 지닌 불가해함은 인간적 영역을 뛰어넘는 신의 세계로부터 이미 부여받은 것이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고난은 ‘신의 섭리’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유려한 영상과 인물들의 내레이션으로 입증해 나간다.
‘트리 오브 라이프’가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주와 생명, 자연과 인간의 모든 현상과 형상 속에 신의 섭리가 현현해 있음을 상징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 본다면 특정 종교의 교의에 갇힌 영화로 한정하기에는 그 폭이 의외로 넓다. 범신론적 해석의 가능성도 충분히 열려 있다. 어쩌면 보는 내내 너무 거창하고 폼만 잡는 듯해 불편했던 이 영화를, 무언가의 이끌림에 의해 다시 음미하게 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확장된 해석의 열린 가능성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영화적 묘미에도, 혹은 칸의 선택(황금종려상)이라는 영예로운 훈장에도 ‘트리 오브 라이프’는 보편적 걸작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그 한계가 뚜렷한 작품이다. 우주적 질서와 신의 섭리가 개인적 삶과 구조적으로 묶이지 못하고 그 연관이 도식적 조합처럼 느껴진다거나, 종교적 대전제가 작품 전체를 유기적 통합으로 이끌고 있지 못한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테렌스 맬릭 감독의 개인 역량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영화가 지향했던 무리한 설정 때문으로 보인다.
영화라는 장르가 지닌 무궁한 가능성에도 분명 영화적 한계는 존재한다. 테렌스 맬릭은 그 한계에 도전한 것임에 틀림없다. 2시간 17분짜리 영화를 본 우리들은 6시간 분량의 편집본을 준비하고 있다는 감독의 진의를 아직 다 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트리 오브 라이프’는 실패한 영화라기보다는 미완성의 영화에 가깝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 영화는 완벽하게 완성되기 어려운 작품이다. 그 이유는 이 영화에서 말하는 ‘신의 섭리’가 이 영화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체로 신의 뜻을 다 알지 못한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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