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청바지와 빳빳한 정장 바지, 꽃무늬 시폰 원피스와 빈티지 맥시 스커트, 날렵한 하이힐과 투박한 스니커즈. 그 어떤 것과 매치해도 어울려서 특유의 기품을 잃지 않는 옷이 하나 있으니 바로 트렌치 코트다.
쇼핑백에서 바로 꺼낸 것보다 장롱 속 빛바랜 아버지의 그것이 더 멋스럽고, 누구나 한 벌쯤 갖고 있지만, 누가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옷이 되는 것이 트렌치 코트다.
전장에서 장교들이 입던 트렌치 코트는 소재와 길이, 색깔 등으로 끊임없는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그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올해 트렌치 코트는 어떤 변화를 시도했고,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살펴보자.
좌 : 올해 트렌치 코트는 소매나 라펠 부분에 가죽이나 퍼, 데님 등 색다른 소재를 덧댄 배색 디자인이 유행이다. 빈폴레이디스 제공 |
트렌치 코트를 무심히 봤다면 한 가지 이미지로만 떠오를 수 있지만, 지난해만 해도 망토 형태의 케이프 스타일, 야상 점퍼 스타일, 소매가 없는 조끼 스타일 등으로 변형된 디자인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올해는 디자인에 변형을 주기보다는 클래식한 트렌치 코트의 원형은 유지하면서 소재에 변화를 준 스타일에 주목해야 한다.
한때 기본형 트렌치 코트 위에 가죽이나 ‘퍼 조끼’를 덧입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올해는 아예 소매나 라펠(Lapel·코트나 재킷의 앞 몸판이 깃과 하나로 이어져 접어 젖혀진 부분), 어깨선 등 일부분에 다른 소재를 적용한 디자인들이 많다.
‘바바리’로 통용되면서 트렌치 코트의 보통명사가 된 브랜드 버버리의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도 서로 다른 소재와 컬러를 대비시킨 ‘콘트라스트 슬리브’ 디자인들이 등장했다. 특히 네크라인에 탈부착 가능한 ‘퍼(fur·털)’가 있는 전형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소매와 어깨 부분에 부분적으로 퍼를 적용한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국내에서도 베이지나 카키 등 기본 컬러에 소매만 블랙이나 데님 컬러로 차별화하거나, 라펠이나 허리 소매에 가죽과 데님 소재를 적용한 디자인을 많이 볼 수 있다.
가슴 바로 아래나 허리 라인에 주름과 셔링을 넣어 트렌치 코트 자체가 원피스처럼 보이는 디자인은 올해도 꾸준히 사랑받을 전망이다. 원피스형 트렌치코트들은 몸에 꼭 맞는 라인에 굵은 벨트를 매치함으로써 잘록한 허리를 강조해 여성스러움을 극대화했다.
복고풍의 영향을 반영해 1950∼60년대 전형적인 트렌치 코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어깨와 소매가 둥글게 이어지면서 품이 넉넉한 오버사이즈 트렌치 코트도 빈티지 스타일로 유행할 것으로 보인다.
# 여자, 트렌치 코트로 변신하라
여성들은 한 벌의 트렌치 코트로도 여러 가지 스타일을 연출하곤 한다. 트렌치 코트 안에 무엇을 입느냐에 따라, 트렌치 코트의 단추를 채우느냐 풀어두느냐, 벨트를 질끈 묶느냐 등 연출하기 나름이어서 그 사람의 패션 감각을 가장 잘 드러내기도 한다.
트렌치 코트의 정석이자 가장 여성스러운 스타일은 몸에 꼭 맞는 트렌치 코트 안에 스커트나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이나 부츠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때 치마 길이는 트렌치 코트보다 짧아야 깔끔한 오피스 레이디 룩을 완성할 수 있다.
프랑스 여배우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줄무늬 티셔츠와 청바지에 트렌치 코트를 무심한듯 자연스럽게 걸쳐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갱스부르처럼 빈티지 스타일로 연출하고 싶다면 청바지에 어깨선이 둥글면서 헐렁한 품에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길이의 트렌치 코트를 선택하자. 단추를 아예 채우지 않고 열어둔 채 입거나, 무심하게 여민 듯 허리끈을 질끈 묶어준다. 트렌치 코트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맥시 스커트를 매치하면 빈티지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낼 수 있다.
키가 큰 여성은 무릎 아래로 떨어지는 긴 기장의 트렌치 코트를 입으면 한결 늘씬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트렌치 코트보다 긴 원피스를 입을 때는 단추를 모두 채우지 않는 것이 좋다. 반면 키가 작다면 원피스형의 짧은 트렌치 코트가 어울린다. 안에는 트렌치 코트 길이보다 짧은 원피스나 스커트, 반바지 등을 입고 트렌치 코트는 가능한 짧고 몸에 꼭 맞게 입되, 벨트는 허리보다 약간 윗쪽에서 묶어주면 키가 커 보인다.
좌 : ‘트렌치 코트=정장’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 청바지와 티셔츠, 카디건 위에 캐주얼하게 트렌치 코트를 입어도 멋스럽다. 스튜어트 뉴욕 제공 |
여성들이 트렌치 코트를 다양하게 연출하는 반면 남성들은 수트 위에 걸치는 정도로 경직되게 소화하는 경우가 많다. 스타일리스트 정윤기는 “트렌치 코트와 이너웨어를 비슷한 계열 컬러로 톤온톤 배치하면 자칫 나이가 들어보일 수 있다”면서 “컬러를 대비시키면 한결 세련되고 어려보인다”고 조언했다.
트렌치 코트도 형태에 따라 수트와 캐주얼 착장에 어울리는 것이 따로 있다.
수트에 매치할 때는 어깨선이 둥글게 떨어지는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에 허리는 딱 맞고 기장은 무릎까지 떨어지는 일자형 트렌치 코트를 선택해야 한다. 어깨선이 둥글어야 수트의 형태를 흩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블랙, 네이비, 다크 그레이 등 짙은 컬러의 수트를 많이 갖고 있는 만큼 트렌치 코트는 그보다 밝은 베이지 컬러를 추천한다.
캐주얼하게 입고 싶다면 어깨선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셋인(set in) 소매의 트렌치 코트가 어울린다. 셋인 소매의 트렌치 코트는 소매 통이 좁고 기장도 허벅지 중간 쯤까지 내려오는 것이 좋다. 안에는 청바지에 셔츠 혹은 라운드 티셔츠에 카디건을 입거나 V네크라인 니트를 입어주면 세련돼 보인다.
여성들이 가방으로 패션을 완성하듯 남성들은 신발로 스타일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수트에 트렌치 코트를 입을 때 밋밋하게 수트 색깔과 같은 블랙 로퍼(끈으로 묶지 않는 가죽구두)를 신기보다는 브라운이나 와인 컬러의 옥스퍼드화(끈으로 묶는 가죽구두)나 발목까지 덮는 앵클 부츠로 포인트를 주는 것이 좋다.
김수미 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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