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그는 ‘모범생’ 이었다. 집에선 말 잘 듣는 아들이었고, 학교에선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주말이면 성당에 나가 “선하게 살자”는 말을 들으며 묵상을 했다. 서울대 공대에 입학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들어간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편안하고 약속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고민이 찾아왔다. 1998년 외환위기 직전 혼란스러운 경제 상황 속에서 일순간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매는 중년의 가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측의 경영 논리 앞에서 무기력한 개인들을 보며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없어 억울함을 당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남들이 볼 때는 배불러 보일 수 있는 고민이었지만 그는 진지했다.
회사를 나왔고 16년이 흐른 지금, 그는 법률가와 시민 활동가의 영역을 넘나들며 ‘공익변호사’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개인채무자회생법, 신용불량자 개선법 등 서민을 위한 법을 위해 뛰는 한편 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한 1인 시위에도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민들에게는 차갑고 엄격한 것으로만 여겨지는 법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만들고 싶다는 이헌욱(45) 변호사를 지난 12일 서울 서초동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측의 경영 논리 앞에서 무기력한 개인들을 보며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없어 억울함을 당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남들이 볼 때는 배불러 보일 수 있는 고민이었지만 그는 진지했다.
회사를 나왔고 16년이 흐른 지금, 그는 법률가와 시민 활동가의 영역을 넘나들며 ‘공익변호사’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개인채무자회생법, 신용불량자 개선법 등 서민을 위한 법을 위해 뛰는 한편 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한 1인 시위에도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민들에게는 차갑고 엄격한 것으로만 여겨지는 법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만들고 싶다는 이헌욱(45) 변호사를 지난 12일 서울 서초동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헌욱 변호사가 서울 서초동의 법무법인 로텍 사무실에서 서민금융과 관련해 정비돼야 할 국내 법률 체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
학창 시절 이 변호사는 평범했다. 공부 잘하고, 말 그대로 ‘범생이과’에 속하는 학생이었다. 대학에 입학했던 1987년은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화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때다. 그러나 그는 관심이 없었다. 강 너머에서 일어나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배를 따라 몇 번 거리로 나간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선배와 동료의 눈치에 못 이겨 마지못해 나갔을 뿐이다.
그는 “그때만 해도 ‘민중을 위해서 산다’는 식의 논리가 지배적이었지만, 운동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평범한 대학 시절을 보낸 뒤, 어렵지 않게 ‘제일모직’에 취직했다. 보수도 좋고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앞둔 1995년부터 회사에서는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해고가 상시 이뤄졌다. 능력과 관계 없이 40대 중반의 가장들이 단지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눈앞에서 잘려나갔다. “매년 한 부서에서 예고도 없이 3∼4명이 잘리는 것을 지켜보며 ‘회사에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들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기 어려웠어요.” ‘구조조정에 이은 가정경제 파탄’이라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사회에 대한 구조적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2년 반 만에 그는 사표를 내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는 ‘사법시험’을 선택했다.
공대를 졸업한 그가 29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사법시험을 준비한다고 하자 대부분 “그만하라”며 말렸다. 얼마 못 가 그만둘 것이라는 냉소적인 시각도 많았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공부했고, 2년 반 만에 합격증을 거머쥐었다. 전체 인원의 7%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연수원을 나온 그가 택한 것은 판사나 검사가 아닌 ‘변호사’였다. 그는 “수료 성적이 좋았지만 어려운 사람을 직접 도울 수 있는 민사소송을 하고 싶었다”며 “처음부터 그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으로 준비했던 시험이어서, 판검사에는 미련이 없었다”며 웃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2001년, 연수원 동기와 로텍합동법률사무소를 차리고 그가 찾아간 곳은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서민들과 가장 밀접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시민단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거창한 활동을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에서 비상근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관련 소송들을 돕기 시작했다. 시야가 확장되면서 점차 공익소송을 넘어 국민 전체를 위한 입법 활동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서민의 경제적 권리와 관련해서는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가계부담을 낮추기 위한 입법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다.
“200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빚에 허덕이는 이들이나 채무불이행자를 위한 법 체계가 정비되지 않았습니다. 카드빚 등으로 서민들이 심각한 경제적 위기 봉착했지만 그들을 위한 법이 없었던 셈이죠. 이들을 돕는 문제가 시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같은 성공사례보다도 법적 구제에 실패한 사례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털어놨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집을 나간 뒤 사망했는데, 아이들을 생각해 이혼하지 않고 있다가 남편이 남긴 수억원의 빚을 고스란히 떠안은 경우가 있었어요. 상속포기 절차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빚을 물려받지 않을 수 있었는데 법을 몰랐던 거죠. 비정규직으로 두 자녀와 힘들게 사는 분이어서 정말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결국 상속포기 소송에서 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최근 부산저축은행 피해자들을 위한 소송 대리인을 맡고 있는데 후순위채권을 잘 모르고 사신 분들을 보면 안타깝다“면서 “법을 몰라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서민 금융 관련법들은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 변호사는 2011년부터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서민금융 외에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등 다양한 민생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서민 정책의 근거가 되는 입법 활동의 ‘브레인’ 역할에 그치지 않고 애써 마련한 정책이 실제 서민생활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그를 주변 사람들은 ‘제2의 박원순’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권변호사로 시작해 참여연대, 희망제작소 활동까지 이어간 궤적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사교육비 절감을 위한 운동에도 적극적이다. 사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는 지금의 교육환경을 바꾸고, 학력차별을 금지하자는 것이 골자다.
“몇 년 전부터 교육비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해 대학 등록금 관련 운동을 해왔는데,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사람들도 지난해 서울시립대 등록금이 반값이 되는 것을 보며 ‘어, 정말 되는구나’라고 느끼는 계기가 됐습니다. 사교육비 절감 운동도 언젠가는 좋은 결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워낙 여러 가지 일을 해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지만 서민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할 땐 기분이 좋다”며 웃었다.
그가 공익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문제는 ‘법률복지’가 약하다는 것이다. 그는 “소송 당사자로 참여할 때 형사소송은 그나마 국선변호인을 쓸 수 있지만 민사는 국선변호인이 없어 일반 서민들은 변호사를 선임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며 “소송구조 제도가 있긴 하지만 거의 사용되지 않아 ‘나홀로 소송’이 너무 많다”고 설명했다.
“국민이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도록 국가가 도와주죠. 마찬가지로 국민이 법적 권리를 침해당하면 법원에 마음 놓고 갈 수 있게 도와줘야 합니다.”
그의 꿈은 이처럼 법을 멀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법이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최근 법이 통치나 권력수단이 된 면이 있지만, 원래 법은 국민을 편안히 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며 “법조인들이 힘든 공부를 하면서 체득했던 이 단순한 원리를 실천에 옮겨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희경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