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혼자 건너야 할 강 있어”
날씨나 분위기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하다는 뜻의 ‘을씨년스럽다’라는 형용사가 1년 중 제일 어울리는 때가 바로 지금, 11월이다. 찬바람에 한껏 움츠러든 채 잿빛 낙엽이 나뒹구는 거리를 걸으며 누구나 ‘종말’에 관해 떠올린다. 어차피 태어난 그 순간부터 끝을 향해 치닫는 것. 인생은 외롭고 쓸쓸할 수밖에 없다. 그런 뼈에 사무치는 쓸쓸함을 언어로 형상화한 소설집과 시집이 나란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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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혜경씨는 등장인물의 독백을 통해 “사람은 저마다 혼자 건너야 할 강이 있다”고 말한다. 문학동네 제공 |
표제작 ‘너 없는 그 자리’는 남자에 대한 여자의 눈물겨운 집착을 그린다. 여자의 구애가 부담스러웠던 남자는 “회사에서 케냐로 발령을 받았다”며 떠난다. 얼마 뒤 아프리카에 있어야 할 남자를 서울 시내에서 우연히 목격한 여자의 얼굴에는 이제 표독스러운 광기가 서린다.
‘그리고, 축제’의 주인공은 어릴 적 친척한테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다. 오랜만에 마주친 가해자의 웃음 띤 얼굴을 보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여자의 몸은 남편과의 잠자리에서도 좀처럼 열릴 줄 모른다. “그만 잊어”라고 위로하는 남편에게 여자는 “당신이 뭘 알아”라며 쇳소리를 지른다.
‘미남’ 시인 이승희(47)씨의 두 번째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문학동네)는 우울함과 쓸쓸함의 결정체라고 할 만하다.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경수씨가 “시집을 읽는 내내 쓸쓸한 바람이 불고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고 표현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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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승희씨는 시집 서두에 “정직하게 울었더니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피어났다”고 적었다. 문학동네 제공 |
“패랭이 꽃잎 속으로 조그만 철대문이 열렸다. 하굣길 딸내미인가 싶어 슬그머니 들여다보는데, 바람이 등을 툭 치고 간다. 꽃이 파란 철대문을 소리 내어 닫는다. 등이 서늘하다.”(‘낮술’ 중에서)
끊임없이 엄습하는 자해 충동에 맞서고 낮술로 외로움을 달래는 모습이 측은함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 또한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한 번은 지나쳐야 할 통과의례 아니겠는가. 이미 겪었기에 시인은 이처럼 자신있게 노래할 수 있는 것이리라.
“꽃이 지는 소리처럼 네 무릎가를 적시는 강물의 아침처럼 그렇게 열 손가락 끝이 빨갛게 울어버린 밤이 지나면, 네 몸에서 핀 꽃을 보게 될 거야. 그리고 네 손톱에 자라는 흰 달이 다시 널 마중 나올 때까지 행복할 거야.”(‘봉숭아 물들다’ 중에서)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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