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도 삼교통합론 기원 이루고 호국불교 실천
벽송지암·정관일신 등도 휼륭한 차시 다수 남겨 매월당 김시습과 점필재 김종직, 한재 이목에 의해 분수령을 이루었던 조선 전기의 차는 결국 조선 전기 차 정신으로 ‘청담(淸談)’ ‘허백(虛白)’을 이끌어내면서 비권력(非權力) 지향의 차 정신을 만들어 낸다. 이는 청백리(淸白吏) 정신이기도 하다. 선비들은 벼슬을 하기도 하지만 벼슬에서 물러나서도 청백리 정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한 집안에 영의정을 낼 수는 있어도 청백리를 내기는 어려웠다.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조선의 양반관료사회로 탈바꿈하면서 다농(茶農)은 수가 줄어들었는데 공세(貢稅)는 줄지 않고 중국 명(明)과의 교류를 하는 조선은 고려의 영고차 형태에서 산차(散茶)로 중심이동을 했다. 조정에서는 고려의 다풍(茶風)을 이어 사헌부에서는 다시(茶時)라는 제도를 운영하기도 했다.
가정의례에서도 차를 사용하고 묘제나 시제에도 차례를 행하였다. 사찰은 사전(寺田)을 줄이고 도첩제(度牒制) 시행으로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 관에 노비나 군적에 편입하는 바람에 재력과 인력을 잃어버리고 차 생산기지로서의 힘을 잃어버린다. 고려 때의 다방(茶房)은 세종 때에 사존원(司尊院)으로 이름을 고치고 내시부(內侍府)와 함께 궁에 있게 되었다. 성종은 도첩제마저 폐지하고 출가를 일절 불허했으며 중종은 승과도 폐지하였다.
그나마 나라에서는 회암사(檜巖寺)를 ‘작법(作法)’의 절로, 진관사(津寬寺)를 ‘수륙재’의 절로 지정하고 노비와 재정을 지원하였다.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조선 개국은 물론이고 수도를 정하는 데에도 의견을 냈던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주석한 곳이다.
그나마 전통적으로 불교를 숭상해 오던 왕실과 부녀자들의 힘을 입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문정왕후는 보우(普雨) 스님을 후원하였으며, 더욱이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이 일어나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사찰의 쇠퇴는 요업에도 영향을 미쳐 청자문화가 쇠퇴하면서 고려의 청자기술은 퇴보하여 분청사기로 변하였다.
선가의 차인들을 보면 함허기화(涵虛己和·1376∼1433), 벽송지암(碧松智巖·1464∼1534), 허응보우(虛應普雨·?∼1565), 청허휴정(淸虛休靜·1520∼1604), 정관일신(靜觀一禪·1533∼1608), 운곡충휘(雲谷沖徽·?∼1613), 부휴선수(浮休善修·1543∼1615), 사명유정(四溟惟政·1544∼1610) 등을 들 수 있다.
함허기화는 고려 우왕 2년에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21세에 회암사의 무학대사에게 출가했다. 나중에 봉암사(鳳巖寺)에서 입적하였다.
“이 차 한 잔은/ 나의 옛정을 드러내노라./ 차에는 조주의 풍정이 함축되었나니./ 권하노라, 그대여! 차 한잔 드소서.”
“한 잔의 차는 일편단심을 드러내네./ 일편단심이 지금 이 차 한 잔에 있다네./ 제발 이 차 한 잔 맛보소서./ 한 잔의 차를 한 번 맛보면/ 마땅히 한없는 즐거움 생길 것이외다.”
“산 깊고 골 좁은 곳에 인적은 없네./ 진종일 쓸쓸히 세상과는 떨어져 있네./ 낮이면 한가로이 산에서 출몰하는 구름 보고/ 밤이 되면 헛되이 하늘에서 달을 보네./ 화롯가에 차 연기 가득 퍼질 제에/ 향기 가득한 마루에서 옥으로 전서를 쓰네./ 속세의 번잡스러움 꿈꾸지 않고/ 오직 선열(禪悅)에 젖어 좌정하여 세월 보낸다네.”
함허기화의 차시에서 삶과 죽음이 함께하고 물(物)과 영(靈)이 함께함을 볼 수 있다. 심물일체(心物一體)의 선차 정신을 읽을 수 있다.
허응보우는 백담사에 있다가 문정왕후의 부름을 받아 봉은사 주지로 있으면서 봉은사를 선종(禪宗)의 수(首)사찰로 만들었으며, 봉선사를 교종의 수사찰로 만들었다. 승과를 다시 회복하고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였다. 차를 즐겼고 차시 20여 수를 남겼다. 많은 제약 속에서나마 불교의 중흥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늘 높은 절벽 작은 암자에/ 백발의 스님 홀로 좌면(坐眠)하고 있네./ 운무에 취감(醉?)하여 시비를 잊어버렸다네./ 꽃 피고, 잎 떨어지는 사이 세월을 안다네./ 한 쌍의 늙은 학이 다연(茶煙) 너머에 놀고/ 첩첩산중에 약방아 찧는 소리/ 이 산중에 신선세계 있음을 들었다네./ 우리 스님 아마도 영랑선인(永郞仙人)일세.”
이 시를 선사(禪師)로서의 자신의 생활을 담담하게 그리면서 어느덧 마음 깊숙이 숨어있는 선교(仙敎)의 신선세계에 와 있음을 실토한다. 한국인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이 신선임을 알 수 있다.
“작은 창 높은 누각 좌선자리 싸늘하네./ 물 길어 차 끓이니 솥 안에 달 가득하네./ 두견이 즐거워하는 까닭 몰랐으나/ 나와 이 밤을 남쪽을 향해 절규하네?”
두견은 한(恨)의 새인데 그 새와 하나가 되는 정한을 노래하고 있다. 절간 스님의 생활이 왜 그렇게 한스러운지를 알 수 없다. 남쪽은 부처님의 고향이 아닌가.
“그대 오직 참된 은사(隱士) 그리워/ 벼슬 버리고 표연히 이곳에 왔네./ 달밤은 그윽한 정취를 내 품고/ 신선의 부뚜막엔 차 연기 나네./ 기이한 만남 어찌 우연이겠나!/ 해묵은 서원으로 잘 만난 것이겠지./ 마음에는 정조 굳게 지키며/ 청산에서 함께 늙어야지.”
서산대사가 만년을 보낸 묘향산 절벽 위 암자 풍경. 묘향산은 단군신화에서 환웅천황이 내려온 태백산과 같은 곳이다. |
이는 서산대사가 비록 승려이지만 전통 풍류도의 전통을 이은 인물임을 말한다. 말하자면 가장 한국적으로 선종을 토착화한 인물이다. 허응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1556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을 지휘하여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후 그는 모든 벼슬을 버리고 제자인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妙香山)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가 묘향산에서 여생을 보낸 것은 참으로 그다운 행보였다. 묘향산은 단군신화에서 환웅천황이 내려온 바로 태백산을 말한다. 고등종교인 불교가 들어옴에 따라 종래의 무교 계통의 신묘(神廟)·단묘(壇廟)는 점차 주변부로 밀려나 없어졌지만 이상하게도 묘향산과 황해도 구월산에는 그것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아마도 단군신앙의 본거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라를 방어하는 호국 의지가 강했던 서산이 묘향산에서 만년을 보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 보고 교선일체(敎禪一體)를 주장하여 오늘날 조계종의 정통을 수립하였다.
“소나무에 바람 불고 전나무에 비 오려네./ 급히 동병(銅甁)에 끓는 물 죽로(竹爐)에 옮겨라./ 기다려 저 소리를 들으며 함께 고요해진 후/ 한 잔의 춘설차 맛을 어찌 제호에 비기리.”(松風檜雨到來初/急引銅甁移竹爐/待得聲聞俱寂後/一?春雪勝醍?)
초의 스님으로 인해 한국 차의 대표적인 절이 된 해남 대흥사 성보박물관에는 ‘서산대사유물관’이 있다. 아마도 차의 전통이 면면하기에 후대에 초의 스님이 나온 것이 아닐까. 그가 남긴 시 구절의 백미를 살펴보자.
“낮에는 한 잔의 차/ 밤이면 한 자리 잠/ 푸른 산과 흰 구름/ 생멸이 없음을 함께 기뻐하네.”
“중의 평생 일/ 차 달여 조주(趙州)에게 바치는 일”
위의 두 차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일상에서 차를 즐겼는가를 알 수 있다.
“산비에 솔 평상이 우는데/ 옆 사람은 떨어지는 매화를 노래하네./ 어지러운 봄 꿈 한바탕 끝나니/ 시자는 차를 달여 내오네.”
“달이 비친 시냇물 떠서/ 차 달이니 푸른 연기 흩어지네./ 날마다 무슨 일을 논하는가/ 염불과 참선뿐이라네.”
사명당 유정은 밀양 출신으로 서산대사의 수제자이며 임진왜란을 전후로 수많은 신통력을 보여준 인물로 우리에게 이름이 높다. 임진왜란 중에는 의병을 일으켜서 공을 이루고 정전협상에서는 실력을 발휘하여 일본과 화친하고 볼모로 잡혀간 백성 3500명을 데리고 왔다.
사명당이 설법으로 일본 장수들을 무릎 꿇게 하고 있는 장면(전쟁박물관 소장). 사명당은 일본에 가서 조선 포로 3500명을 구해 귀국했다. |
금강산 보덕사(報德寺)를 비롯하여 팔공산·청량산·태백산 등을 유람했으며 임진왜란 때에 서산대사를 도와 승군(僧軍)을 통솔하고 체찰사 유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도 의령에 내려가 전공을 많이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1604년(선조 37)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가 되어 갔던 사람 3500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嘉義)의 직위와 어마(御馬) 등을 하사받았다. 사명당만큼 호국불교를 실천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스승이 입적하자 이듬해 묘향산에 들어가서 스승의 영탑을 찾아 슬퍼한 뒤에 치악산으로 들어갔다가 가야산(伽倻山)에서 사망했다.
“죽림원에 차 연기 푸르고/ 꽃 핀 삼월은 맑기도 하네./ 강호엔 따뜻한 기운 서리고/ 버드나무는 푸른 실로 희롱하네.”
이것은 일본 상야수 죽림원에 가서 벽에 쓴 자작시이다. 전쟁의 상흔은 크고 인간은 정전협상으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데 자연은 아랑곳없이 봄을 만끽하고 있음을 노래했다.
“사람들이여, 세월 헛되이 보낸다고 말하지 마라./ 차 달이는 틈에도 한가로이 흰 구름을 쳐다본다네.”
조선 조정에서는 불교를 배척하고 승려의 수를 줄이고 도성 출입도 못하게 하였지만 그래도 승려들은 국난을 맞아 호국에 앞장섰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을 보노라면 깨달음을 추구하는 승려와 외적의 침략을 받고 의병으로서 전쟁에 참여하는 승려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애국이 반드시 깨달음인 것은 아니지만 깨달음은 애국을 포용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승려 차인들로 벽송지암, 정관일신, 운곡충휘, 부휴선수 등도 훌륭한 차시를 남겼다.
벽송지암은 “일미선(一味禪)이란 어떻게 생기는가/ 불자(拂子)를 들어 흔들어 떨며/ 시자 불러 차 달여 오라 말하고/ 조금 지나 읊기를/ 푸른 대나무 곧은 바람과 잘 어울리고/ 붉은 꽃은 이슬과 향기를 머금고 있다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정관일신은 “솔바람소리 귀를 맑게 하고/ 개울물 소리는 꿈속 혼을 부르네./ 재 올린 다음 드는 한 잔의 차는/ 아침저녁 풍월이라네”라고 노래한다.
운곡충휘는 “아지랑이 풍로의 연기와 섞여 푸르고/ 샘물은 차와 어울려 맛과 향을 낸다네./ 조그만 강 위 절에서/ 잠을 잊고 청담을 나누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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