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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준의 7080사람들] '서울 이곳은'의 주인공 장철웅

입력 : 2013-02-15 14:29:04 수정 : 2013-02-15 14:2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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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인기리에 방영됐던 MBC TV 화제의 드라마 ‘서울의 달’ 타이틀곡 ‘서울 이곳은’을 기억하십니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 최민식, 한석규, 채시라 등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드라마 ‘서울의 달’. 가수 장철웅은 이 드라마의 OST 제작에 참여한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우리집으로 와’, ‘서울 이곳은’, ‘내일은 해가 뜬다’, ‘이룰 수 없는 사랑’ 등 많은 자작곡을 만든 그는 “모든 음악에는 생명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집으로 와'로 1983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장철웅은 음악에 첫 발을 내디뎠다. 실패와 좌절을 맛보기도 했지만 꿋꿋하게 모든 것을 딛고 일어난 가수 장철웅. 현재는 원음방송 ‘노래하나 추억둘’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그를 ‘강상준의 7080사람들’이 찾아갔다.

요즘 6살짜리 아들 보는 재미에 산다는 그는 이전에는 자기중심적 삶을 살았다면 지금은 아들을 위해 산다. 아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다는 그를 보며 삶의 여유와 사랑이 느껴졌다.

‘1994년 인기리에 방영됐던 MBC TV 드라마 ‘서울의 달’ OST ‘서울 이곳은’은 드라마의 인기를 타고 대중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 곡을 만든 장철웅이라는 가수는 곡에 비해 인지도가 훨씬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의 독집에 묻혀있던 ‘휴식을 위하여’라는 곡을 들은 ‘서울의 달’ 연출자 故 정인 감독은 “의도적으로 써도 이런 곡이 안 나올 만큼 ‘서울의 달’과 맞아 떨어지는 곡”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장철웅은 역시 “‘서울의 달’ OST 제작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아마 제 음악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행운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마도 본인의 숨어있던 자작곡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아 행운이라고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시 드라마 방영시간에 MBC 드라마국으로 곡에 대한 문의전화가 엄청나게 들어왔다고 한다. MBC 드라마국에서 궁여지책으로 ‘서울의 달 주제곡 가수 장철웅’이라는 작은 현수막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장철웅은 “전화 받으면서 현수막을 보고 바로 대답할 수 있게끔 한 거겠죠”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드라마 방영 이후 첫 음반 주문량이 3만장 정도 들어와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화제의 드라마 ‘서울의 달’은 무명 탤런트였던 최민식 씨, 한석규 씨, 채시라 씨, 김원희 씨 등이 스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 드라마다. 그 중심에 화제의 곡 ‘서울 이곳은’의 가수 장철웅이 있었다.

-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음악은 제 삶에 있어 비타민이죠. 라디오 DJ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틈틈이 곡도 쓰고 있습니다. 늦둥이 6살짜리 아들하고 눈싸움도 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 유년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고, 중학교 졸업 후에 아버지 직장을 따라 부산으로 이사를 갔어요. 부산에서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은 대구에 있는 영남대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사실 살다보면 인생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길로 가는 경우가 있잖아요. 저는 원래 가수의 꿈이 없었어요. 음악과는 전혀 다른 꿈을 키웠거든요. 저는 대학생 때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학가요제에 출전해서 은상을 받은 것이 결정적으로 제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음악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터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 축구선수로도 활동한 적이 있으시죠.

"고등학교 때 워낙 축구를 좋아해서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2학년까지 축구선수로 활동했습니다. 운동을 직업으로 하는 분들을 보면 보통 초등학교 때 많이 시작하잖아요. 저도 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돼서 마음속으로만 ‘운동하고 싶다’고 생각만 했어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학교에 축구팀이 있더라고요. 1학년 초에는 응원을 했었는데 문득 ‘지금도 늦지 않았어. 축구를 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사실 동네에서는 축구를 제일 잘했거든요. 감독님을 한 달 넘게 쫓아다니면서 운동 시작하게 해달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후 운 좋게 대학도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했어요. 2학년 때까지 주전으로 뛰었고 이후에 부상 때문에 그만두게 됐죠. 대학 3학년 때 대학가요제 출전하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 같아요."

- 대학가요제 출전 계기는요.

"영남대학교에서 축구를 하다가 다쳐서 부상 후유증이 오래갔어요.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대학 3학년 정도 되면 취업이 다 결정되던 시기였거든요. 실업팀을 가든 다른 쪽으로 취업을 하든 결정이 안되다 보니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던 찰나에 대학교 봄 축제의 가요제에 나가게 됐어요. 대학 캠퍼스 내에서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이 나와서 노래 자랑하는 거였거든요. 거기서 대상을 받게 됐어요. 같은 해 학생회에서 학교 대표로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대구 경북 예선에 나갔는데 대상을 받았어요. 20대 초반 나이에 엄청 놀랐죠. 축구로 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노래로는 대상을 두 번 씩이나 거머쥐게 됐으니까요. 이게 뭔가 싶기도 했고요. 1983년 MBC 대학가요제 본선에 출전해서 은상을 받았습니다. 가수를 하라는 신의 계시인가 생각하게 됐죠.(웃음) 그래서 가수를 직업으로 삼게 됐습니다."

- 대학가요제 입상 후 정식음반을 낼 때까지 시간이 꽤 있었는데. 

"대학 졸업 후에 서울에 상경해서 몇 년 고생을 했어요. 예전에 가수한다고 하면 어른들이 반대를 많이 하셨잖아요. 대학가요제 출신이라도 직장 들어가서 평범하게 살길 바라셨어요. 그런데 음악이라는 것이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잖아요. 저는 상도 두 번이나 받았고요.

1980~90년대 초반엔 명동에 라이브카페가 많았잖아요. 먹고 살아야하니까 오디션을 많이 보러 다녔는데 당시 주눅이 들었어요. 저보다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더라고요. 

몇 년을 일자리 때문에 카페를 전전하다가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됐어요. 박강성 씨, 최성수 씨, 윤태규 씨, 강승모 씨 등등 당시 유명하진 않았지만 그 친구들 덕분에 일자리가 생기게 됐죠. 노래도 자꾸 하다보면 연습이 되잖아요. 그 때 실력이 향상된 것 같아요. 언더그라운드에서 고생했던 과정이 지금 생각해보면 저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언더 생활은 어느 정도 하셨나요.

"한 3년 정도한 것 같아요. 이 후에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더라고요. 방배동 카페 골목과 양수리에 라이브 카페가 많이 생겨서 일자리가 많아졌죠. 그때부터는 수입도 많아지고, 자동차와 집도 사고 했어요. 음반 기획자도 만나게 됐고요. 한번은 기획사 대표가 사무실에 놀러오라고 해서 간적이 있었거든요.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을 부른 가수 이상우 씨가 그때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절이었는데요. 기획사 사무실에 들렀다가 이상우 씨의 소속사에 들어가게 됐어요."

- 정식음반은 언제 발매하셨나요. 

"1991년에 ‘우리집으로 와’라는 곡으로 정식음반을 발매했어요. 그 노래가 FM에서 전파를 타면서 소위 말하는 ‘얼굴 없는 가수’, ‘언더그라운드 가수’라는 별칭이 붙었어요."

- 전부 작사 작곡하시나요.

"처음엔 작곡가에게 곡을 받으려고 찾아갔었는데요. 그땐 저작권법이 지금처럼 잘 정비돼 있지 않은 시절이라 작곡료를 줘야 곡을 써주는 행태였어요. 제가 작품료가 있었겠습니까. 작품료가 없어서 곡 받기가 어렵다 보니 직접 곡을 써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쓴 것이 ‘우리집으로 와’, ‘서울 이곳은’, ‘내일은 해가 뜬다’, ‘이룰 수 없는 사랑’ 등 입니다."

-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으셨죠.

"‘이룰 수 없는 사랑’ 전에 나왔던 곡이 ‘내일은 해가 뜬다’라는 곡이 있는데요. 홍보를 하려고 전국 방송국을 돌아다녔어요. 저를 뒷받침해줄 매니저가 없었을 때니까 직접 뛰어다녔고 그 때 방송에 대한 감각을 터득했어요.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제 일기장 속에 숨겨진 이야기 같은 노래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들이었거든요. 누구나 살면서 사랑에 대해 쓴맛을 보잖아요. 그 내용을 노래로 만들었어요.   

음반을 방송국에 갔다드렸더니 노래가 너무 슬프다면서 방송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서 1년 정도 묻혀있었어요. 당시엔 포기 했었어요."

"2000년대 초반에 라디오 청취율 1위를 기록했던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라는 프로그램이었어요. 담당 PD님과는 김흥국 선배 때문에 안면이 있었거든요. 어느 날 찾아가서 노래 한번 들어보시라고 앨범을 드렸어요. 1주일 후에도 노래가 안 나와서 또 찾아 갔죠. 한 달 후에 라디오에서 제 노래를 들었다고 동료들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거예요. 처음 듣는 노래인데 짠하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후에 제가 감사 인사차 PD님을 찾아갔어요. PD님께서 대뜸 방송국에 전화 좀 하지 말라고 전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어떤 영문인지 몰랐어요. PD님은 방송에 노래가 나간 후에 제가 팬을 동원해서 방송국에 전화하라고 한줄 아셨나 봐요. 제가 저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죠. ‘지금은 라디오 시대’라는 프로그램은 노래가 많이 나오지 않고 사연 위주의 방송인데요. 1주일 후에 또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전파를 타게 됐어요. 그러고 나서 PD님께서 저에게 직접 전화하셔서 방송국에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청취자들이 직접 전화해서 노래에 대한 문의를 했다 하더라고요. 열심히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이후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금 제가 DJ를 하고 있으니까 후배들이 음반을 들고 오면 음악은 진실이라고 이야기 해줍니다. 음악이 좋으면 시간이 걸려도 사랑을 받게 돼있다고 말입니다."

- 축구 잘하는 연예인 BEST 3안에 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베스트1 아닌가요? (웃음) 고맙습니다. 한 때 그랬죠. 사실 김흥국 선배 때문에 많이 알려지게 됐어요. 저는 노래 잘하는 가수로 소문이 났으면 했는데요. 김흥국 선배와 친해지면서 축구로 더 부각이 됐어요. 지금은 축구 잘하는 가수보다는 노래 잘하는 가수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저도 나이가 들다 보니까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네요."

- DJ 한지 얼마나 됐나요.

"2007년에 시작했으니까 5년 정도 됐네요. 원음방송 FM 89.7 ‘노래하나 추억둘’이라는 프로그램이고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방송하고 있습니다. 

제 인생에 기적 같은 일이 몇 차례 일어났는데요. 고등학교 때 축구를 시작했던 일과 MBC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했던 일, 그리고 DJ가 된 일 등입니다. 음악을 하다 보면 음악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겠다는 꿈을 꾸지만 현실화되기는 어렵거든요."
 
- DJ로 발탁되게 된 계기는요. 

"어떤 방송국 국장님이 하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말도 하고 노래도 했었거든요. 그게 인상적이었나 봐요. 제가 하기 전에 홍서범 씨가 진행을 했었는데 DJ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국장님께서 낮 프로그램 DJ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하시더라고요. 갑자기 귀가 확 열렸어요. 하고 싶었던 일이었으니까요. 운 좋게도 2007년에 시작을 하게 돼서 벌써 5년이 지났네요."

- 어떤 음악을 주로 소개하나요. 

"일단 옛날 음악을 시작할 당시에 부르고 듣고 하던 음악들을 방송을 통해서 소개하고 같이 듣고 하는 2시간이 너무 좋아요. 7080 음악, 올드 팝 등 다양한 곡이 소개됩니다."

- 가수와 DJ의 차이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DJ는 매력이 많은 직업입니다. 얼굴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전국에 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제가 소개하는 음악을 듣고 힘들 때 위로를 받는 사람도 있으니 보람찬 일이죠. 제 방송의 주 청취층이 4050세대인데 그들의 삶에 대해 느낄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DJ 일과 함께 소극장 공연이나 일반 행사도 하고 있는데 가수로서 본업인 노래를 하면서 박수를 받을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은 큰 매력인 것 같아요. 가수나 노래를 소개하는 DJ는 큰 틀에서 보면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 가장 기억나는 청취자는.

"무명시절에 서울 반포 아파트에서 하숙을 한 적이 있어요. 담요와 기타 하나 들고 들어가서 살 때였어요. 그 하숙집에 딸이 있었는데 당시 중학교 1학년 이었어요. 그땐 한창 사춘기잖아요. 저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 신경이 많이 쓰였나 봐요. 아저씨 같은 오빠랑 한집에 사니까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제가 거실로 나가면 방으로 쏙 들어가곤 했거든요. 제가 보기엔 웃겼죠. 제가 노래를 불러주면 그 친구 입장에서는 신기했나 봐요. 제가 생활이 좋아져서 이사를 하게 됐어요. 그 친구와는 10년 이상 연락이 끊어졌다가 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편지가 와서 읽어봤는데요. 그 사춘기 소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다가 우연히 제 방송을 듣고 장문의 편지를 보내게 된 거죠. 제가 노래 불러주던 목소리랑 비슷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통화를 하게 되고 인연이 닿아서 그 분 남동생 결혼식에 가서 노래도 하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 결혼을 좀 늦게 하셨죠.

"곡을 만들 때 상상을 해서 쓰는 곡도 있고 경험을 토대로 쓰는 경우도 있잖아요.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제 경험을 바탕으로 썼어요. 제가 결혼하기 전 30대 때 8년 정도 교제한 여성과 헤어진 적이 있었는데요. 사랑을 하다가 헤어지면 후유증이 있잖아요.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오래 가잖아요. 40대 때 여성을 만나는 건 30세 때 보단 어려움이 있습니다. 독신으로 살려고 하다가 늦게 인연이 돼서 결혼을 하게 된 거죠. 지금 제 아들은 6살이 됐습니다. 저를 많이 닮았어요.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모든 것이 제 중심이었어요. 그러나 아이가 생기고 난 후에는 제 인생이 아이를 위한 삶이 돼버렸습니다. 제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죠. 지금은 뭘 잘할까 지켜보고 있어요. 어떤 분야를 도전하더라도 끝까지 뒷바라지 하고 싶어요."

- 애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올해는 경제도 안 좋았잖아요. 저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모두 힘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열심히 방송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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