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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 권상호의 국어야 놀자] 〈7〉 가물 끝에 단비

입력 : 2013-08-25 20:30:18 수정 : 2013-08-25 20: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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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물다의 ‘가’는 가장자리, ‘물’은 물(水) 아닌 ‘마름’ 뜻해 중부지방은 오랜 장맛비로 몸살을 앓았는데, 제주도와 일부 남부 지역은 가물에 시달리고 있다니 삼천리금수강산의 반쪽인 이 땅도 푸지게 큰가 보다. 소나기가 소의 등을 나누 듯이 반쪽 장마, 반쪽 가물이 반쪽 한반도를 또 둘로 나누었다. 이번 주말에 남부지역에 비 소식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비 내리기를 비는 수밖에 없다.

한글 판본체로 쓴 글씨이다.
비가 와도 걱정, 비가 오지 않아도 걱정, ‘걱정도 팔자(八字)’라 했으니, 피할 수 없는 걱정이렷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질 것 같으면 천만번이라도 걱정을 해야겠다. 살아있기에 ‘우리’는 ‘우려(憂慮)’한다. 우리는 ‘worry(걱정)’하면서도 ‘Woori Bank(우리은행)’에 돈을 맡긴다.^^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걱정도 팔자(賣, sell)’일 수 있다. 걱정은 싸게 팔기가 아니라 밑져도 팔아야 한다. 바겐세일(bargain sale)이 아니라 패닉세일(panic sale)이어야 한다. 티베트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는 날씨를 ‘가물’ 또는 ‘가뭄’이라고 한다. ‘가물’은 ‘가물다’라는 동사의 어간을 그대로 사용한 명사이다. ‘가물- 가물다’와 같은 예로는 ‘빗- 빗다, 품- 품다, 배[腹]- 배다, 띠[帶]- 띠다, 신- 신다, 되- 되다’ 등을 들 수 있다. ‘가뭄’은 일반적인 명사형 접미사 ‘ㅡㅁ’에 의해 파생된 명사로 ‘가물’과 함께 둘을 표준어로 삼고 있다. 그리고 ‘

『內外〉 『믈 〉 가물 〉 가뭄’의 변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물(가뭄)’, ‘가물다’의 두 말 속에는 ‘물’자가 다 들어있음에도 물[水]이 없어 걱정이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렇다면 여기의 물은 ‘물[水]’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면 무엇일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가물’의 ‘-물’은 정반대의 의미인 ‘마름(渴, dry)’의 뜻이다.

‘가물’의 고어는 ‘『內外’, ‘가물다’의 고어는 ‘『內外다’이다. 여기의 ‘內外’은 ‘AFP음다다(渴, dry)’의 어간 ‘AFP음다’의 축약형이라 생각한다. 또, ‘『-’는 ‘가장자리, 변(邊), 변두리, 끝’의 뜻이니, 결국 ‘『內外’은 ‘가장자리까지 마름’, ‘『內外다’는 ‘가장자리까지 마르다’의 뜻이 되겠다. 어원적으로 보면 ‘가물’보다 ‘가말’이 더 어울리고, 지역에 따라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말이나, ‘가뭄’과 ‘가물’만을 표준어로 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태도나 매무새 따위를 바르게 하는 것을 ‘『다)다(가다듬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가장자리를 다듬다’에서 온 말이겠다. ‘냇『(냇가), 우물『(우물가)’라고 할 때의 ‘-『’는 가장자리의 의미가 있고, ‘『업다(가없다)’의 ‘『-’는 끝의 의미를 지닌다. 척척이로다.

가물을 한자어로는 ‘한발(旱魃)’이라 한다. ‘가물 한(旱)’자를 보면 나뭇가지[十] 끝[一]에 햇살이 쨍쨍 내리쪼이고 있는 모양이다. ‘가물 한(旱)’의 결과는 똑같은 발음의 ‘땀 한(汗)’과 ‘원통할 한(恨)’으로 끝난다. ‘가물귀신 발(魃)’자에 ‘귀신 귀(鬼)’자가 들어있는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가뭄을 맡는 귀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가물귀신의 뒷발에 ‘달릴 발(?)’자가 붙어있는 것으로 볼 때, 가뭄 귀신은 자메이카의 단거리 선수 우사인 볼트보다 빨라서 따라잡기 힘들다. 아, 그렇구나. 가뭄을 번개 같은 귀신의 소행이라 믿었기 때문에, 예부터 황제나 왕이 직접 나서서 기우제를 지냈구나.

‘천자문(千字文)’ 250구 중의 첫 구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이다. 여기에서 ‘현(玄)’의 뜻을 흔히 ‘검을 현(玄)’으로 보고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늘을 검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검을 흑(黑, black)’자가 따로 있으니 이는 ‘가물 현(玄, dark)’으로 보는 게 옳다고 본다. 정확한 뜻은 ‘가물가물하다’이다.

사랑을 뜻하는 한자로 ‘사랑 자(慈)’와 ‘사랑 애(愛)’가 있다. ‘사랑 자(慈)’는 ‘玄 + 玄 + 心’으로 이루어졌으며 ‘가물가물한 사랑, 가없는 사랑(endless love)’의 뜻으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나 중생에 대한 부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사랑 애(愛)’자 안에는 ‘마음 심(心)’과 ‘받을 수(受)’자가 들어 있으니 ‘마음을 받는 것이 사랑’이라는 진실한 사랑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면 자(慈)는 마음을 주는 것이요, 애(愛)는 마음을 받는 것이겠다.

노장(老莊)의 학문을 가리켜 현학(玄學)이라 한다. 그 세계가 깊고 높으며, 넓고 가마득한 학문이기 때문에 붙인 말일 것이다. 나이 들어 눈이 가물가물해지는데, ‘가물 현(玄)’자가 가물거리며 나타나니 꿈을 꾸는 듯하다. 북한말 중에 ‘눈가물치다’는 말이 있다. 몹시 지치거나 졸려서 눈꺼풀이 자꾸 내려와 눈을 깜작거릴 때 쓰는 말인데, 눈이 가물가물한 상태를 지나면 잠이다. 

사랑을 뜻하는 두 글자 자(慈)와 애(愛). 글자 모양으로 보면 자(慈)는 마음을 주는 것이요, 애(愛)는 마음을 받는 것이다.
마침내, 남부지방에 단비가 내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기다리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진정한 ‘가물 끝에 단비’라 하겠다. 쪽잠이 확 날아간다. 사무실에서 뛰쳐나와 기지개를 켜자 삼각산이 눈에 들어온다. 간밤에 가을을 부르는 비를 몰래 맞은 북한산도 말쑥한 얼굴에 부끄럼 타며 구름 타월을 허리에 걸치고 있다. 매혹적이다. 구름 뒤에는 언제나 빛나는 태양이 있고, 가물 끝에는 반드시 단비가 기다리고 있다.

권상호 라이브 서예가·수원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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