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미 의회 증언은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소책자로 발간돼 전 국민을 감동시키며 애국의 대명사가 됐다. 이 증언으로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된 박 이사장은 이후에도 리틀엔젤스를 이끌고 해외에 나가 국위를 떨치거나, 문선명·김일성 평양회담을 수행하며 세계적인 빅뉴스를 만들었다. 27일 오전 11시 잠실 롯데호텔 월드 크리스탈볼룸에서 윤기숙씨와 회혼례를 겸해 80여 년 인생역정을 담은 생애화보집 출판기념회를 갖는 박 이사장을 서울 능동 한국문화재단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카랑카랑한 음성이며, 조국을 변호하던 투사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한국문화재단은 어떤 곳인가.
“리틀엔젤스(舊 대한어린이 예술단)를 태동시킨 산실이다. 제 집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1962년이면 우리가 아직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했던 궁핍하던 시절인데, 문선명 총재께서는 저에게 어린이 무용단 창설을 명하셨다. 이유인즉, 한국전쟁을 치른 우리나라는 기아와 기근으로 세계인들의 눈에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니 5000년 이어온 문화적 전통마저 폄하되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문 총재께서 한국을 알리려면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잘 녹아 있는 전통무용을 보급해야 한다고 했다. 왜 하필이면 어린이 무용단일까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50년이 지난 지금 그 말씀이 적중했음을 느낀다. 어린이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평화의 상징이다. 심지어 공산권 국가 공연에서도 사랑을 받았다. 어린이들이 아니었다면 한국을 그렇게 효과적으로 알리지 못했고, 지금까지 지탱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1960년대에 세계를 무대로 한국문화를 보급했으니, 리틀엔젤스야말로 한류의 원조다. 문 총재님의 혜안에 새삼 놀란다.”
1961년 박보희 이사장이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보좌관으로 발령받아 출국할 때 문선명 총재와 초대 리틀엔젤스 단원들이 공항까지 환송나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
“65개국 넘게 순회공연 다니며 문화사절이자 외교사절 역할을 해냈다. 순회 횟수는 계량하기 어려울 정도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리틀엔젤스를 극진히 아껴주셨다. 그때는 해외공연을 연 400회 이상 했고, 공연할 곳이 많아 3팀으로 나누어 나가기도 했다. 초중생들이 6개월 가까이 해외에 나가 있게 되자, 아이들 교육을 위해 국어교사까지 대동했다. 박 대통령께서는 해외에서 돌아오면 단원들을 꼭 청와대 오찬에 초대해 주셨고, 크리스마스 때도 부르셨다. 사실 리틀엔젤스 예술단과 선화예술중고등학교, 유니버설아트센터 등이 있는 2만평 가까운 현 한국문화재단 부지도 박 대통령의 배려로 마련한 것이다.”
―‘박보희’ 하면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떠오른다. 어떠한 각오로 미 의회에 섰는가.
“한국 정부가 재미 실업가 박동선을 통해 미국 의회에서 로비를 벌인 ‘박동선사건’도 사실 내막을 알고 보면 자연스런 생존권의 발로였다. 당시 착실히 경제를 도약시키던 한국 정부로서는 주한미군 감축에 대한 보완책과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특별지원책이 미국 의회로부터 승인되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로비 유혹을 떨칠 수 없었다고 본다. 프레이저 의원은 전후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야욕으로 한국 정부를 곤경에 빠트렸는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국민에게 돌아왔다. 나는 풍전등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조국의 처지를 잘 알고 있고, 또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판단했기에 피눈물을 흘리며 변호했다. 더구나 스승인 문선명 총재는 승공운동의 선봉장이셨고, 퇴폐풍조로 신음하는 미국을 살리려는 분이었기에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총 5차례 청문회 가운데 프레이저 의원은 3차례 참관 이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통쾌하다.”
1970년대, 한국문화재단을 찾은 창설자 문선명 한학자 총재와 박보희 이사장 내외. |
“내가 만난 김일성은 ‘된다, 안 된다’를 명확히 하는 등 이치에 맞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김일성이 죽지 않고 계획대로 남북정상회담에 나섰다면 큰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김정일도 솔직한 면모가 있다. 김일성 조문을 갔을 때인데, 빈소에서 친절하게 맞아주며 “선친께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문 총재님께 여쭈어 봐서 그분의 말씀대로 하라고 하셨다”라고 하더라. 같은 나라도 아닌데, 하기 힘든 말이었을 것이다. 김정은은 40년 가신이자 고모부였던 장성택을 처형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노출했다. 장성택이 유일하게 충언해 줄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이제 그에게는 충언해 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김정은 시대에 무력이 아닌 평화적 통일의 기회가 올 것이다. 중국은 그동안 북한을 무조건 지원했으나,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위상에 걸맞은 세계적인 인물이 되려는 뜻이 있다. 시진핑이 한반도 통일에 기여한다면 노벨평화상을 받을 것이다. 그가 박근혜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것도 좋은 징조다. 핵을 사용하면 그 순간 자신들도 괴멸될 수밖에 없음을 북한 스스로 잘 안다. 북한을 다시 방문해서 김정은의 친구가 돼주고 싶다. 그의 조부와 부친을 만났던 사람으로서 진심 어린 충고도 해주고 싶다.”
―가정연합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1957년 소령 계급장을 달고 군생활을 할 때인데, 당시 이화여대 교수로 통일교회에 입교한 김영운 선교사에게 통일원리 강의를 들었다. 전쟁에서 몇 번이나 생사를 넘나든 경험이 있었기에 사후세계 이야기가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그래서 이 말씀을 펴낸 분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알겠다고 하면서도 계속 피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어 무조건 청파동으로 찾아갔다. 당시 문 총재님은 허름한 군용 점퍼를 걸치고 있었지만, 어딘지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날 밤 12시까지 문 총재님께 말씀을 들었다. 마치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 같았다. 다음날 곧바로 입교했다. 교회라고는 하지만, 낡은 적산가옥에 간판도 없고 너무 초라했다. 김 선교사께서 말끔한 장교복을 입은 나를 데리고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27일 부인 윤기숙씨와 회혼례를 갖는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이사장은 “그것이 나만의 자랑일 수는 없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며 “인간이 사는 의미는 서로 협력하고 사랑하며 아들 딸을 낳고 키우는 부부생활에 있다”고 강조했다. 김범준 기자 |
“몇 권의 책으로 쓴다 해도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한 분이다. 소련 공산주의가 붕괴한 것은 하나님주의를 주창하신 문 총재님과 여기에 호응한 레이건 대통령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문 총재님은 1970년대 미국에 건너가서 공산주의가 망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그것을 단계적으로 추진했다. 문 총재님은 미국에서 워싱턴타임스를 창간해 저를 사장에 앉혔다. 신문은 사설을 통해 공산주의의 그릇됨을 공격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유일하게 읽은 일간지가 워싱턴타임스였다. 부인 낸시 여사의 말에 따르면 다른 신문을 보면 대통령의 건강에 이상이 올 정도라고 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내게 ‘보이지 않는 보좌관’이라는 별명까지 지어줬다. 1991년 소련의 붕괴를 가져오게 한 장본인이자 영웅은 문 총재님과 레이건 대통령이라고 확신한다. 그 과정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지구촌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가.
“이 세상은 제멋대로 가지 않는다. 하나님이 경영하신다. 하나님이 지구를 저주하셨다면 미·소 냉전시대에 벌써 핵무기 전쟁으로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더딜지라도 하나님은 올바른 세계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틀고 계신다. 인간이 깨달아 다 함께 평화의 길로 나서야 한다. 미래는 밝다. 가깝게는 내 당대에 하나님주의로 통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불장난을 할 수는 있겠지만, 통일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통일의 그날을 보고 죽고 싶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to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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