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를 나와 중견 사업가로 성장 가도를 달리다 우연히 도박에 손을 댄 정덕(66)씨. 불과 3년 반 만에 360억원을 잃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가 체험한 도박의 실체다. 모든 사행산업이 이 땅에서 사라져야만 하는 그의 논거이기도 하다. 정씨는 전국 도박 피해자 모임인 세잎클로버 대표를 맡아 ‘사행산업의 종말’을 위해 싸우고 있다. 싸움의 대상은 국가와 사행산업 사업자다. 정부는 조세 확보와 지역경제 활성화 등을 명분으로 합법 사행산업을 육성해 국민에게 도박을 학습시키고 중독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강원랜드 카지노 등 사행산업 사업자들도 수익을 더 올리려고 편법과 불법을 동원해 수많은 사람을 도박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는 게 정 대표의 시각이다.
17일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가 자리한 정부세종청사 4동 1층 민원인 접견실에서 정 대표를 만났다. 그는 “‘사행산업은 우연에 의해 이용자에게 재산상 이익과 손실을 준다’는 정부의 정의는 틀리다. 사행산업은 확률적으로 이용자에게 반드시 패배를 안기는 구조로 돼 있다”고 잘라 말했다. 그가 도박중독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 연세대를 졸업하고 대우실업에 입사한 그는 가죽 제품 개발과 수출을 담당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학원에서 업무와 밀접한 무역학을 공부했다. 주경야독 3년 만에 경제학 석사학위를 딴 그는 1977년 피혁의류를 수출하는 삼애실업을 창업했다. 당시 만 30세였다.
정 대표는 “1990년대 피혁의류 수출 분야에서 선두를 달렸다”고 회상했다. 중국 공장에 4000명, 한국에 460명의 종업원을 거느렸다. 1억달러가 넘는 수출 덕분에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에도 회사는 빚이 없었다. 정 대표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으로부터 표창과 상장을 받았고 자신의 성공 이야기가
공중파방송에 소개된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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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 세잎클로버 대표가 17일 정부세종청사 4동 로비에서 체험을 바탕으로 강원랜드 카지노의 불법영업실태 등을 고발한 자신의 저서를 들고 “사행산업은 합법이든 불법이든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세종=우상규 기자 skwoo@segye.com |
당시 한 사람의 1회 베팅한도는 1000만원이었다. 하지만 “잃은 돈을 빨리 만회하려면 대리 베팅을 해주는 ‘병정’을 이용하라”는 카지노 측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병정 5명을 세워 1회 테이블 상한선인 6000만원까지 베팅했다. 그는 “길게는 일주일간 강원랜드에서 도박하고, 하루에 최대 30억원을 잃은 적도 있다”며 몸서리쳤다. 2006년 4월 미국에서 큰딸이 교통사고로 숨진 소식을 듣고도 가지 않고 도박을 했다. 보다 못한 아들이 강원랜드에 출입제한을 신청했다. 그런데 강원랜드 측이 곧바로 “아들의 출입제한 철회 의사표시만 있으면 출입할 수 있다”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는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3년6개월 만인 2006년 10월 회사와 9층짜리 빌딩 등 모든 재산을 탕진했다. 우울증으로 자살까지 기도했다. 아들의 신고로 출동한 119구조대가 위치추적 끝에 서울의 한 모텔에서 사망 직전인 그를 살렸다. 이후 마음을 다잡은 그는 사행산업 문제에 눈을 돌렸다. ‘병정’ 등 강원랜드 불법영업에 대한 최초의 민사소송을 제기해 2008년 1심과 2010년 2심에서 일부승소 판결을 받고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2010년 11월에는 전국도박규제네트워크와 전국도박피해자모임 공동대표를 맡아 도박 추방 활동을 줄기차게 펼치고 있다.
그는 2011년 10월 사행산업의 부작용, 강원랜드 카지노의 불법영업 실태, 재판장의 강원랜드 편들기, 정부·국회의원의 강원랜드 감싸기 등을 신랄하게 고발한 ‘대한민국에 정의를 묻다’를 펴냈다. 작년 5월에는 한 달간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하며 합법도박의 즉각적인 중지를 요구했다. 그는 “합법 사행산업은 단기적으로 세수와 고용 증대 등의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로 가정파괴, 자살 등 도박중독에 의한 사회적 비용이 더 크다”고 강조했다. “사행산업을 뿌리 뽑는 전담기구를 신설해 주시기를 청원합니다. 도박의 폐해가 후손에게 대물림되지 않도록 구국의 결단으로 도박을 근절해 국민의 불행을 막아주십시오.” 정 대표는 한 달 전 박근혜 대통령에게 건의문을 보냈다.
세종=박찬준 기자 skyland@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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