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마당에 대형 작품이 놓여 있다. 작가가 나무막대 끝 헝겊봉에 불을 붙여 불춤을 춘다. 뿌연 연기가 작품을 감싸돌 쯤 불춤은 멈췄다. 화폭 앞에서 붓춤이 아닌 불춤을 추는 모습은 생소하기 그지 없다. 지난주 말 일산신도시 인근에 위치한 한국 단색화 1세대 작가 하종현(79)화백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의 풍경이다. 붓질로 마무리된 작품에 그을음을 입히는 작업이다. 색의 깊이감을 더해주기 위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 노화가의 모습에 숙연함이 느껴졌다.
“이제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어 작업할 시간도 그렇게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일까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몸을 재촉하게 돼. 마지막 불꽃을 처연하게 태워야 이 세상 소풍이 아름다웠노라고 하지 않겠나.”
“이제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어 작업할 시간도 그렇게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일까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몸을 재촉하게 돼. 마지막 불꽃을 처연하게 태워야 이 세상 소풍이 아름다웠노라고 하지 않겠나.”
불꽃이 달린 나무봉을 들고 있는 하종현 화백. 한때 신문섭, 김구림, 민중미술의 대표 격인 신학철 등과 함께 아방가르드협회를 이끌 정도로 실험정신이 강한 그는 화폭에 깊이감을 주기 위해 불꽃의 그을음까지 활용하고 있다. |
“단색화는 군소리를 덜어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어. 색에 있어서도 그렇고,형태에서도 그래. 꾸미지 않는 단순미의 극치라 할 수 있지. 가식 없이 드러내는 거야. 제 분수 제 모양이지.”
그는 노스님의 누더기 가사를 예로 들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했던 성철스님을 떠올려보게 된다. 평생 동안 입었던 한 벌의 누더기 가사는 스님의 엄격했던 구도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혼란과 과잉의 시대에 큰 가르침이 됐다.
“단색화는 아마도 성철 스님의 누더기 가사에서 느끼는 ‘청빈의 미학’ 같은 거야. 산은 산이요,물은 물이라 한 것은 군더더기 없음의 극치라 할 수 있지. 본질 그 자체의 드러냄이야.”
사실 단색화는 하나의 유파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동시대를 살아간 작가들이 캔버스 앞에서 수많은 날들을 각자 고민해 낸 결과물이다. 어느날 문득 서로를 바라보니 닮은꼴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면벽 수도승이 깨달음을 얻고 어느날 토굴에서 나와 동료 수도승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던 모습이라고 보면 돼. 가섭존자의 염화미소 같은 것이지.”
그는 단색화를 탄생시켰던 시대적 배경도 주목한다. 문화적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독자적 미술양식을 만들어 내려는 시대적 결과물이란 점을 주지시킨다.
“전후 미국의 추상미술(추상표현주의·미니멀리즘)과 일본의 모노하, 한국의 단색화는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어. 모두들 문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지. 미국은 추상미술을 통해 유럽문화의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었어. 일본도 모노하를 통해 서구 모방과 답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지.”
작업실 앞에서 나래를 펴듯 활짝 웃음을 짓고 있는 하종현 화백. |
“외형적으론 서양의 틀에 대한 강한 거부의 몸짓이라 할 수 있어. 서양이 앞에서만 그리니 나는 뒤에서 그려보는 거야. 우리가 그동안 서양의 틀에 갇혀 있었잖아. 해방, 자유선언을 해야지.”
한국 단색화는 요즘 ‘핫한 종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새로운 ‘물건’을 찾지 못해 초조해 하고 있는 서구 미술계가 한국 단색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서구 화랑과 소더비 등 외국 경매사 등의 러브콜이 이를 말해준다.
“이참에 한국 단색화에 대한 이론적 연구작업도 좀 더 심화될 필요가 있어. 서구 미술계는 아마도 자신들의 모노크롬이나 미니멀 아트에 단색화를 집어넣고 싶어할 거야. 그래야 이해도 쉽고 장사하기에 편할 테니깐. 하지만 비슷해 보이면서도 태생이 다르니 독자적 미술장르로 자리매김시켜야 해. 그래야 서구의 일회성 소모품으로 전락되지 않아.”
그는 서구 미니멀리즘과 단색화는 엄연히 다르다고 강조한다. 미니멀리즘이 작가의 개념적 표현에 집중했다면, 한국 단색화는 금욕적 견딤의 결과물이라 했다.
“마대는 배고픔을 해소시켜 주었던 미국 원조 밀가루 자루였어. 맨 정신으로 살아내기 어려운 시대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지. 견뎌냄의 몸부림이 단색화를 탄생시켰어.”
그의 단색화엔 우리 산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황토색도 있다. 신작에선 서낭당에 걸어놓은 헝겊 색을 연상시키는 작품도 눈에 띈다. 오래된 기와에서 나타나는 짙은 회색과 검은 빛깔도 있다. 어머니 옷이나 백자를 떠올리게 하는 백색과 청자의 색도 보인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색들이다.
“나의 색깔을 찾아가는 노정이라 할 수 있어, 외국풍에 물들어 어정쩡한 것은 내것이라 할 수 없지. 외국에 나가 보면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고 한국 사람이란 걸 바로 알아보는 경우가 많아. 그만큼 촌스럽다는 얘기도 되지. 고유함은 원래 촌스러운 거야. 그런 촌스러움이 튀어나와야 세계가 바로 알아주는 거야.”
그는 성형공화국이 돼버린 한국의 현실을 거론하며 우리가 촌스럽게 여기는 ‘미(美)’야 말로 세계 누구도 갖지 못하는 ‘미’라고 강조했다.
“서구인들은 성형을 한 한국여성의 얼굴에 대해 어색하고 흉측스럽다고까지 말을 해. 서구인의 모습을 그냥 따라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오히려 작은 눈과 코 등에 매력을 느껴. 아시아가 부상하면서 이 같은 시각은 더욱 강해지고 있어.”
같은 맥락에서 서구인들이 중국 등 아시아 미술이 부상하면서 한국의 단색화의 일본의 모노하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것이다.
“서구의 시각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눈으로 우리 미술품을 소비하는 시대가 오고 있어. 젊은 작가들에겐 기회가 찾아오고 있는 거야. 요즘 미술시장이 안 좋다고 절망하면 바보야.”
그는 내년 2월8일까지 상하이 학고재에서 열리는 이우환 정상화 하종현 3인전에 참여하고 있다. 작품 6점이 전시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대만, 중국인 컬렉터에게 모두 판매된 상태다. 백발에 짧은 말총머리를 한 그는 “이제사 빛을 보는 것 같다”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부터는 모든 틀에서도 자유롭고 싶어. 단색화가 금욕과 절제를 나타낸다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작품을 해 보려고 해. 여러 색채를 넣어 좀 더 풍성해졌으면 하지.”
노화가의 눈망울이 어린아이처럼 빛이 났다. 이제 그에게서 경계와 틀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대지무애(大知无碍)의 경지다. 홍익대 교수와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을 지낸 하 화백은 2001년 30년간 재직하던 대학을 떠나면서 퇴직금으로 ‘하종현미술상’을 제정해 후배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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