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판(版) 세월호’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시민들도 이 참사가 더 안타까웠다. 이 글을 보며 어떤 이들은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가졌을 법하다. ‘우리말 한자 발음으로는 [동방지성]이 중국어 발음으로는 [둥팡즈싱]이네, 왜 저리 비슷하지?’ 東方之星은 ‘동쪽의 별[星]’이란 뜻이다.
그 말뿐인가? 양쯔강은 양자강(揚子江)의 ‘양자’를 중국어로 읽은 것이다. 江은 [장] 정도의 음가(音價)다. 제대로 양자강을 중국어로 읽는다면 [양쯔장]인 것이다. 둥팡즈싱의 경우와 흡사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북경(北京)과 베이징, 천진(天津)과 톈진도 그런 경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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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벽(孔壁)이라고도 하는 노벽(魯壁). 공자사당인 공묘(孔廟)에 있는 이 벽 안에서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피하기 위해 숨겨놓은 책들이 나왔다. |
우리 역사가 펼쳐진 동북아시아에 한자가 많이 유입된 때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가 무르익은 수(隋), 당(唐)대로 추정한다. 이를테면, 당초 東方之星을 우리나 수나라 사람들이나 [동방지성]에 가깝게 읽었을 것이다. 그러다 중국에서는 [둥팡즈싱]으로 변해왔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바깥(隋, 唐)으로부터 문자를 받아들인 경우 그 소리와 뜻이 그것을 전해준 나라보다 더 보수적으로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고 언어학은 풀이한다. 애초 두 지역에서 소리로도 그 글자의 뜻을 공유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비슷하다는 느낌만을 갖게 된 이유다.
우리 한글(훈민정음)은 소리글자(표음문자)로 글자 자체가 발음기호다. 중국의 문자(文字·한자)는 뜻글자(표의문자)로 발음을 표시할 수 있는 기능이 우리 한글과는 다르다. ‘설문해자’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그 발음을 어떻게 표시했을까? 지금처럼 스마트폰 사전에서 말의 소리까지 들려주는 상황과는 달랐다. 소리를 고정하고 기록하는 녹음(錄音)의 개념이 없었던 때다.
독약개(讀若介)라는 ‘讀若’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허신이 펴낸 설문해자의 발음 표기법이었다. (설명하고자 하는 이 글자는) ‘介[개]라고 읽는다’는 뜻이다. 介처럼, 보다 일반적이고 여러 사람이 잘 아는 기본단어를 제시하여 표제어의 발음을 가르쳐주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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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 시기 다음의 문자 구현 형태인 금문(金文). 솥[정(鼎)]이나 술단지[이(彛)], 종(鐘) 등 금속 기물에 기념하고자 하는 문안을 새겼다. |
글자의 소리를 성모(聲母)와 그 나머지의 둘로 나누고 [이분(二分)], 반절상자(上字)로 성모를, 반절하자(下字)로 나머지 요소를 나타낸 것이 반절법이다. 분(分)자를 예로 들면, 부문절(府文切)이다. 府의 ‘ㅂ’(성모)과 文의 ‘ㅁ’을 제외한 소리[운]를 합쳐 [분]으로 읽는다는 뜻이다. 대조적으로 우리 말글은 소리를 자음과 모음, 그리고 받침의 세 요소로 나눈다.
‘둥팡즈싱’의 경우처럼, 이 분(分)자의 현대 중국어 발음은 [펜]에 가깝다. 소리는 [분]에서 [펜]으로 변했어도 옛날 그 소리를 표시하던 반절법 표시는 그대로다. 우리나라에 남은 중국 문자의 한자어 독음(讀音)이 옛날 중국어의 발음이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는 이유다. 한자어는 중국의 문자를 우리 쓰기에 편하도록 받아들인 우리말이다.
크기가 좀 큰 한자사전에는 이 반절법 표시가 다 붙어있다. 한자를 제대로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 이 표시는 중요하다. 이 표시가 있는 자전 하나쯤은 갖추어야 ‘문자가 있는 한국사람’으로서의 공부가 가능한 것이다. 府文切처럼 ‘**切’이라고 표기된 3글자 문장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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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번역된 설문해자 관련 책 ‘설문해자주(注) 부수자 역해’의 표지. |
이 책 중 부수자(部首字) 540여개를 번역한 ‘설문해자주 부수자역해’(염정삼 譯·서울대출판부)가 얼마 전 출판됐다. 허신이 처음 540여개 부수로 구분한 것이 청대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는 214개로 정리됐다. 그게 한 일(一), 선비 사(士), 마음 심(心) 등 지금 우리가 쓰는 부수의 숫자다. 이렇게 설문해자는 한자처럼 동아시아 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요소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사족(蛇足)
중국 관광객이 늘면서 벽중서(壁中書) 얘기가 인터넷에서 자주 눈에 띈다. ‘벽 속의 책’이란 뜻이다. 산둥성 곡부(曲阜·취푸)의 공자사당 ‘공묘(孔廟)’에 이 벽이 있다. 공묘는 공자가 세상을 뜬 후 노(魯)나라 군주 애공(哀公·재위 BC 494∼468)에 의해 조성되기 시작했다.
공벽(孔壁)이라고도 하고 노벽(魯壁)이라고도 하는 이 벽 안에 진시황(BC 259∼210) 시절 분서를 피하기 위해 공자 후손들이 책을 숨겼던 것이다.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파묻은 역사상의 개념인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관련된 얘기다.
한무제(BC 141∼87) 때 그 벽에서 책들이 발견됐다. 이후 경서(經書) 연구가들 사이에 금고문(今古文) 논쟁이 일었다. 고고학적 의미나 의의(意義)뿐만 아니라, 옛[고(古)] 문자와 지금[금(今)] 문자가 서로 달라 생기는 여러 해석의 갈래가 토론과 연구의 주제가 된 것이다. (중국의) 문자가 시기나 지역에 따라 변화가 다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중국 관광객이 늘면서 벽중서(壁中書) 얘기가 인터넷에서 자주 눈에 띈다. ‘벽 속의 책’이란 뜻이다. 산둥성 곡부(曲阜·취푸)의 공자사당 ‘공묘(孔廟)’에 이 벽이 있다. 공묘는 공자가 세상을 뜬 후 노(魯)나라 군주 애공(哀公·재위 BC 494∼468)에 의해 조성되기 시작했다.
공벽(孔壁)이라고도 하고 노벽(魯壁)이라고도 하는 이 벽 안에 진시황(BC 259∼210) 시절 분서를 피하기 위해 공자 후손들이 책을 숨겼던 것이다.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파묻은 역사상의 개념인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관련된 얘기다.
한무제(BC 141∼87) 때 그 벽에서 책들이 발견됐다. 이후 경서(經書) 연구가들 사이에 금고문(今古文) 논쟁이 일었다. 고고학적 의미나 의의(意義)뿐만 아니라, 옛[고(古)] 문자와 지금[금(今)] 문자가 서로 달라 생기는 여러 해석의 갈래가 토론과 연구의 주제가 된 것이다. (중국의) 문자가 시기나 지역에 따라 변화가 다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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