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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의 스포츠+] 22번의 주인공 이만수, 프로야구 1호안타-1호타점-1호 홈런 친 헐크

입력 : 2016-05-21 08:50:00 수정 : 2016-05-20 13: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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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의 스포츠+]

◇전설의 유니폼 넘버, 22번의 주인공…①헐크 이만수, 프로야구 1호안타-1호타점-1호 홈런의 주인공

이만수(1958년 9월 19일~ )는 대구상고1년때인 1978년 이후 1997년말 은퇴할 때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포수로 이름을 떨쳤다.

지난 2011년 한국야구위원회(KBO)가 프로야구 30주년을 맞아 실시한 올스타 투표에서 포수부분 1위는 물론이고 전체 1위를 차지할 만큼 인기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만수는 화끈한 타력과 몸을 사리지 않는 파이팅, 화려한 리액션, 이름과 얼굴이 주는 푸근함, 의리의 사나이 그 자체로 보이는 등 여러 가지가 겹쳐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니폼을 벗었을 때 삼성 라이온즈는 팬들의 비난에 큰 곤욕을 치렀다..

이만수는 자신의 등번호 22번이 지난 2003년 고향팀 삼성라이온즈에 의해 영구결번 1호로 선정돼 은퇴 때 섭섭함을 어느 정도 덜었다.

△이만수 하면 1982년 3월27일 프로야구 개막전

프로야구는 우리나라 최고 인기스포츠이다.

그러한 인기의 문을 시원하게 열어젖힌 이가 이만수였다 .

이만수는 한양대를 졸업하던 해인 1982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 첫해 4번타자 자리를 궤찼다.

프로야구는 1982년 3월 27일 오후 2시반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야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개막전으로 출범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삼엄한 경호를 받으면 시구한 기억이 난다. 

삼성 1번 타자 천보성은 역사에 영원히 남을 '프로야구 1호 안타'를 위래 MBC 선발 이길환의 초구를 때렸지만 유격수 뜬 공으로 물러났다.

3번타자 함학수는 MBC 1루수 김용윤(훗날 김바위로 개명)의 실책으로 프로야구 첫 주자가 됐다.

이어 등장한 이만수는 볼카운으 3볼 2스트라이커에서 이길환의 7구째를 잡아 당겨 좌익수쪽 2루타로 함학수를 홈으로 불러 들였다.

한국 프로야구 1호 안타이자 1호 타점을 올린 순간이다.

이만수는 5-2로 앞선 5회 초 공격에서 선두타자로 나와 MBC 두 번째 투수인 유종겸을 5구를 역시 잡아 당겨 좌월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한국프로야구 1호 홈런'을 기록했다.

첫 홈런을 터뜨린 기념으로 이만수는 당시 시가 95만원 상당의 등나무 응접세트를 받았다.

삼성과 MBC와의 개막전은 연장 10회말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이 또한 유명하다.

△이만수의 기록들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1호 타점-1호 홈런=1982년 3월 27일

*타격왕 1회(1984년) *홈런왕 3회(1983, 84, 85년)

*타점왕 4회(1983,84,85,87년) *골든글러브 5회(1983~1987년)

*통산타율 0.296

*통산 홈런 252개-안타 1276개-타점 861-볼넷 554개-삼진 490개-몸에 맞는 볼 118개 

△사실은 김시진과 동기인 투수출신, 중학교 4년 다녀 동생과 같은 학년

이만수는 장래가 촉망되던 투수였다. 

이만수는 대구중 1년 때 '야구부원'모집을 보고 지원해 야구부원이 된 뒤 타고난 어깨를 인정받아 투수 훈련을 받았다.

학원스포츠의 경우 야구 소질이 가장 뛰어난 이가 투수 겸 4번타자로 활동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만수도 그런 케이스.

이만수는 타고난 어깨로 대구중을 문교부장관기 전국중학교 대회에서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대구상고로 진학 한 뒤 포수기근에 시달리던 팀 사정 등으로 포수로 전향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대구상고-한양대-삼성에 이르기까지 근 20여년을 붙어 다닌 1년선배 김시진 투수와는 동갑이라는 점이다.

1970년대는 팀을 위해, 또는 늦은 나이에 운동에 뛰어든 선수 중 몇 몇은 1년 정도 유급하는 일이 많았다.

이만수도 대구중을 4년 다녔다.

그런 까닭에 이만수는 바로 밑 동생이자 3남 1년 중 막내인 이용수와 대구상고 동기동창이기도 하다.

△강견으로 고1때부터 대형포수로 전국 휩쓸어

이만수는 고1때 국회의장배에서 10타수 5안타로 타격상을 받았으며 정상급 투수로 나섰을 만큼 강한 어깨와 좋은 순발력 등 포수로서 모든 조건을 겸비한 선수로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1년선배 김시진과 짝을 이룬 1976년 대구상고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1977년 투수 박영진과 더불어 전국의 강호로 군림했다.

특히 고3때 1977년 청룡기에서 타격 타점 최다안타 등 4관왕을 차지해 각 대학의 스카우트 공세를 받았으나 장효조-김시즌 등 대구상고 선배들의 뒤를 이어 한양대로 진학했다.   

△타고난 운동능력은 집안 내력

이만수는 3남 1녀 중 둘째 아들이다.

이만수의 모친은 키가 170cm에 달했을 만큼 당시로서는 큰 체구로 힘이 장사였다.

이만수의 형제 중 첫째형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운동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보다 4살많은 누나 이미옥씨는 만 51세때인 2005년 여자프로골퍼가 돼 '역시 이만수 집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만수와 대구상고 동기동창인 동생 이용수는 테니스 특기자로 성균관대에 진학했다. 대구상고시절 이만수는 야구부 주장, 이용수는 테니스부 주장으로 '형제가 대구상고를 다 말아 먹는다'라는 말까지 들었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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