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이번 주 역사 속 스포츠] 1963년 12월 15일 역도산 사망, 일본을 메친 전설

입력 : 2017-12-10 07:40:00 수정 : 2017-12-08 10:04:00

인쇄 메일 url 공유 - +


[이번 주 역사 속 스포츠] 1963년 12월 15일 역도산 사망, 일본을 메친 전설

▲ 거구의 미국 레슬러를 쓰러뜨리며 패망국 일본을 위로했던 시대의 영웅

역도산(1924년 11월 14일 ~ 1963년 12월 15일)은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 창설 주역으로 거구의 미국 레슬러를 연파, 패전에 숨죽였던 일본 국민들에게 나름의 숨통을 틔여줬던 인물로 유명하다.

프로레슬링이 어느 선까지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됐지만 패전국민 일본인들은 역도산이 서구 레슬러를 혼내는 것에 대리만족감을 느꼈다.

그의 경기는 막 시작된 TV방송을 통해 일본 전역을 중계됐다.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스포츠 스타와 아이돌 스타를 합친 듯한 대우를 받았다. 

또 김일, 안토니오 이노키 등 수많은 스타 레슬러를 배출했다.

▲ 181cm, 110kg의 당당한 체구

함경북도 홍원군 출신인 역도산의 본명은 김신락. 장사 집안에서 태어난 역도산은 181cm, 몸무게 110kg로 당시로는 엄청난 거구였다.

1940년 그를 쓰모 선수로 스카우트한 모모타 가문은 역도산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이후 역도산은 죽을 때까지 이 이름을 사용했다.

1950년 쓰모계에서 자진 은퇴한 역도산은 1951년부터 프로레슬러로 방향전환했다.  

도쿄 이케가미(池上)역 인근의 혼몬지(本門寺)의 역도산 묘지앞에는 동상까지 세워져 있다.

▲ 술집에서 야쿠자와 사소한 시비끝에 칼에 찔려

역도산을 중심으로 한 프로레슬링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돈과 권력, 주먹이 몰려 들었다.

역도산도 자연히 주먹, 즉 야쿠자와 어울리게 됐다. 그 중 일본 긴자일대를 장악한 도세이카이(동성회)와 각별한 친분을 맺고 있었다.

도세이카이는 재일교포 야쿠자인 정건영(마치이 히사유키)이 1957년에 발족한 조직으로 도쿄 진출을 노리던 야마구치 조직과 의형제를 맺는 등 60년대 중후반까지 위력을 떨쳤다.

김일과 함께 일본 레슬링계 스타로 활동했던 안토니오 이노키가 정건영의 경호원으로 일했을 만큼 도세이카이와 정건영의 힘은 막강했다. 

역도산은 1963년 12월 8일 일본 도쿄 아카사카 뉴라틴쿼터 나이트클럽에서 20대 젊은이와 시비가 붙었다.

시비를 건 상대는 24살 무라타 가쓰시로 야마구치파의 라이벌인 스미요시가이 소속의 야쿠자였다.

공식 기록엔 역도산에 힘에 몰렸던 무라타가 등산용 칼로 역도산의 등과 복부를 찔렀다고 돼 있다.

하지만 당시 역도산은 도세이카이 조직원의 경호를 받고 있었으며 정황상 야쿠자간 세력다툼의 희생양이었다는게 정설이다.

스미요시파는 역도산에게 테러를 가하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한편 야마구치와 도세이카이에게 경고하려 했다.

역도산 복수를 맹세한 도세이카이는 조직원을 집결시켰고 스미요시가이는 물론이고 경찰도 이에 대비했다.

양 파벌은 야쿠자 원로의 중재에 따라 휴전에 들어갔다.   

도쿄 이케가미 혼몬지에 있는 역도산 묘지.

▲ 입원 1주일만인 12월 15일 사망, 수많은 인파가 애도

역도산은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 상처를 대소롭지 않게 여겼다. 의료진도 전치 2~3주로 판단했을 정도였다.

12월 9일 도쿄 산노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역도산은 실밥을 풀 때까지 금식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의료진 말을 따르지 않고 탄산 음료를 마셨다.

이 것이 복막염을 일으켜 15일 긴급히 재수술을 실시했지만 때는 늦었다.

역도산 장례식에는 1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들었으며 경찰은 야쿠자간 전쟁을 의식, 삼언한 경비를 펼쳤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이나영 ‘수줍은 볼하트’
  • 이나영 ‘수줍은 볼하트’
  • 조이현 '청순 매력의 정석'
  • 에스파 지젤 '반가운 손인사'
  • VVS 지우 '해맑은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