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6월13일, 독일 베를린의 총리 집무실. 비스마르크의 초청으로 영국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외무장관 언드라시 줄러(Andrassy Gyula) 등을 비롯해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오스만 투르크제국 대표들이 모였다.
줄곧 지중해 진출을 노렸던 러시아가 1878년 3월 오스만 제국을 완파한 뒤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발칸반도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두는 ‘산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한 때문이다. 러시아의 세력권이 발칸반도뿐만 아니라 지중해까지 가시화한 상황.
당시 최대 제국 영국은 라이벌 러시아와 전쟁까지 심각히 고민해야 할 절체절명의 위기로 받아들였고, 발칸반도와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진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제국 존폐를 걱정했다. 프랑스도 중동과 북아프리카 이익이 침해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각국 대표들은 7월13일까지 베를린에서 협상을 거듭한 끝에 극적으로 베를린조약을 체결했다. 외교를 통해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넘어선 것이다. 많은 참가국들이 불만스러워 하면서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가 돼 두고두고 논란이 됐지만.
베를린회의는 국가들이 외교를 통해 전쟁을 막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제1차 대전 전까지 50년 가까이 전쟁이 아닌 평화를 가져와서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한스 모겐소(Hans Joachim Morgenthau)조차 “우리 시대에서 성공적으로 전쟁을 방지한 외교의 중요한 사례”로 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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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 기자 |
‘겸손한 중매 외교’를 통해 성과를 드높인 문재인 정부도 남북 정상회담 준비와 함께 사전 정지작업이 한창이다. 주변 강대국들도 분주하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 영향력 확대를,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노선에 편승해온 일본도 자신의 이해 관철을 각각 겨냥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분위기다.
북한의 비핵화(미국)와 체제보장 및 경제회복(북한)이라는 두 나라의 ‘국가 이익’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회담 결과는 전혀 낙관할 수 없다. 서로간 적대와 불화를 확대할 수도 있고, 프로토콜이 맞지 않아 열리기도 전에 엎어질 수 있다.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외교조차 소용없다면 우리 앞에는 극한 갈등 속에 제재와 압박, 군사적 옵션만이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에게 필요한 건 전쟁을 피하려는, 각자의 국익을 극대화하려는 절절함이다. 그 자리가 바로 외교의 자리이다.
모겐소는, 외교의 가치와 유용성이 많이 하락했지만, 그럼에도 외교가 부활하기 위해선 최우선적으로 ‘십자군 같은 정신’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즉 전쟁을 하고 싶다면 교리를 발전시키고,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얻으려면 교리나 독트린을 버리라는 것이다. 진정한 외교를 하라는 거다.
“외교는 평화를 보존하는 임무에서 여러 번 실패했고, 성공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외교가 때때로 실패했던 까닭은 외교가 성공하기를 아무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회담장에 들어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부디 모겐소의 조언을 새겨 들으시길. 참고로 모겐소는 외교가 부활하기 위해 이밖에도 △정책 목표는 국가 이익 관점에서 정의되고 적당한 힘으로 뒷받침돼야 하고 △외교는 다른 국가의 입장에서 정치를 봐야 하며 △국가들은 자신들에게 필수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모든 문제에 기꺼이 타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봄은 경희궁 뒤뜰에 쑥으로 다가와 있다.
김용출 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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