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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왜 그의 죽음에 통곡하는가, 노회찬 1956-2018[김용출의 스토리]

입력 : 2018-07-29 10:27:00 수정 : 2018-11-10 08: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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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정치인 노회찬의 삶과 죽음
어리석은 선택이었고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원외이던 2016년 3월, 그는 포털 댓글을 조작한 ‘드루킹’이 이끄는 조직 ‘경제적공진화모임’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모두 4000만원을 받았다. 드루킹 측은 경기고 동창 변호사를 통해 접근했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는 의심하지 않았고, 정상적인 정치자금 처리를 하지 않았다.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정치인생 최대의 잘못이었고, 씻을 수 없는 과(過)였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지만 그의 목숨, 온 우주를 앗아갔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2년 후인 2018년. 두루킹 댓글조작 의혹은 경찰 수사에 이어 특검 수사로 번졌고 칼날은 그를 향해 점점 옥죄어왔다. 그는 수없이 번뇌하고 고민했을 것이다. 칠흙 같은 고독 속에서 수없는 번민의 밤을 지샜을 것이다. 자신이 해온 언행과 삶을 되돌아봤을 것이고, 자신이 온몸 던져 일궈온 진보정당 정치도 가슴에 얹히기도 했을 터다.

7월23일. 노회찬 의원은 유서를 남기고 먼 길을 떠났다. 향년 61세. 공개된 유서에서 그는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깊은 안식에 들어갔다.

그런데 말이다. 그의 마지막 길을 떠나보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40도 가까운 폭염에도 노동자, 장애인, 직장인과 대학생 등 전국 곳곳에서 수십만 명의 조문객들이 몰려와 그의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여도 야도, 진보도 보수도 없었다. 그들은 통곡했고 가슴에 그를 담았을 것이다. 과가 분명히 드러났는데도, 대한민국은 왜 그의 죽음에 통곡하는가. 그의 삶은, 생각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먼저 그의 긴 여정을 따라가야 한다.



◆초량동 단칸방의 첼로, 감수성 혁명의 원천

“너 이제 중학생이니까 애가 아니다. 이걸 들어야 된다.” 아버지는 그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 레코드판을 들어보라고 권했다. 처음에는 듣기 싫었지만 자주 들으면서 클래식을 사랑하게 됐다.

“가정 형편이 어렵지만 악기는 하나 꼭 해야 한다.” 어머니는 악기를 배우라고 권했다. 누나는 피아노를, 그는 첼로를 각각 골랐다. 어느 날, 어머니는 그에게 스즈키 중급 첼로를 사다줬다. 그는 부산시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주자였던 배종구 동아대 교수에게서 거의 무료로 첼로를 배웠다.

문학과 예술, 음악을 사랑하고 즐겼던 부모로부터 노회찬은 ‘넉넉한 감수성’을 갖고 태어났다. 1956년 부산에서 시와 문학을 사랑한 도서관 사서 아버지와 교사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함경도 출신으로 전쟁 통에 부산으로 피난온 피난민이었다. 두 사람은 초량동 산동네 단칸방에서 다섯 가족이 세들어 사는 어려운 형편에도 오페라 공연이 있으면 빼먹지 않고 갈 정도로 예술을 사랑했다.

노회찬은 경기고 2학년 시절 이화여고 강당에 초대돼 출연료 3000원을 받고 독주를 했다. 정치 초년생 시절에는 ‘첼로를 켜는 정치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다만 진보 정치인 이미지와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고 인지도도 올라가면서 첼로 얘기는 많이 줄었다.

고교 시절부터 개봉한 한국 영화를 거의 다 볼 정도로 영화광이기도 했다. 바둑이나 포커, 골프 등은 하지 않았다. 그것에 빠질까봐 일부러 안했다고 한다.

노회찬은 어릴 적부터 첼로와 영화 등을 통해 감수성을 키워왔기에 나중에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여유 있는 세상이 되길 희망하게 됐을 것이다. 그는 2010년 책에서 자신의 꿈 얘기를 하면서 각종 차별 철폐나 모순 해결 등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보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2010, 7쪽)



◆10월 유신에 사회의식…고교 시절부터 반독재 운동

1972년, 노회찬은 부산고 입시에서 떨어진 뒤 서울로 올라와 재수했다. 그해 10월, 그는 박정희 정권의 10일 유신을 경험했다. 노회찬의 사회의식을 깨운 부조리였다. 그는 대성학원을 다니면서 월간지 『다리』와 『사상계』 등을 읽었다.

1973년 경기고에 입학해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광필 이우학교 교장 등과 어울리던 그는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학교에 배포하자고 제안했다. 이종걸 등은 흔쾌히 응했다. 노회찬은 유인물 글을 쓴 뒤 부천의 한 교회에 몰래 들어가 등사해 학교에 배포했다.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이 의원은 “엄격히 얘기하면 같이 한 것이 아니라, 노회찬 친구가 주도하고, 만든 것에 제가 따라갔던 친구였기 때문에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인이 다 기획하고 한 것에 대해 함께 했던 기억에서 당당하고, 어린 소년 시절에도 지금 보이는 모습들이 남아있다”고 회고했다.

노회찬은 이후 친구들과 함께 모임을 만들어 『세계철학사』 , 『다리』, 『사상계』 등을 함께 공부했다. 함석헌, 백기완의 강연을 듣는가 하면 불교 고승을 찾아가기도 했다.

1974년 4월3일. 경기고 2학년 노회찬은 민청학련이 유인물을 통해 전국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공동 시위를 벌이자고 제안한 것에 호응, 학교 교실 문을 잠그고 민청학년 유인물을 낭독하기도 했다. 학교는 그때 휴교를 선포했다.



◆“노동자로 살아가리라” 대학 4학년 때 용접 2급자격증

1981년, 전북 고창의 참당암 명부전. 노회찬은 박쥐가 날고 찬 기운이 올라오는 방에서 1개월간 보내면서 부모 및 이성 문제 등에 대해 마음을 정리했다. 학생운동을 접고 노동운동을 준비하기로 했다. 다. 노동 운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자고 생각했다.

그는 앞서 1976년 서울대 철학과를 지원했다가 낙방하고 보충역으로 군복무했다가 제대한 뒤 다시 공부해 1979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학생 운동에 참여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 큰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해야 부조리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한 뒤였다.

대학 4학년이던 1982년, 그는 영등포 청소년직업학교(현재 서울산업정보학교)에 등록해 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땄다. 용접은 다른 기술보다 배우기 쉽고 흔해 쉽게 취직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다.

1983년 2월. 고려대 졸업식과 청소년직업학교 졸업식 날이 공교롭게 겹쳤다. 그는 직업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 노동자로 살아가리라 결심한 그였다. 어머니는 용접공이 되기로 한 아들의 선택에 “왜 하필 이 힘든 길을”이라며 아쉬워했지만 그의 길을 지지해 줬다.



◆1987년 인민노련 결성…노동운동 본격화

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딴 노회찬은 1983년 처음 기아자동차에 합격했지만 대학생 신분이 드러나면서 해고됐다. 다시 인천에 있던 현대정공 하청공장에 취직했다. 그는 당시 “인생 말년까지 거의 전두환 같은 독재체제는 계속될 것이고, 우리는 밤낮 도망 다니거나 감옥에 들락거리게 될 것”(2010, 129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후 대학생들이 위장취업 형태로 공장으로 쏟아들어오자 이들과 함께 서클을 만들고 공부를 함께 하면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경찰의 추적이 받게 됐고, 공장에 더 다닐 수 없었다. 3년 가까이 공장에서 일했다.

1987년 역사적인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독재 체제가 강고하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벼락이었고 사건이었다. 살아 생전 그 같은 일이 결코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논리적 사고로 역사의 역동성을 재단해낼 수 없다”(2010, 129쪽)는 사실을 깨달았다.

6월 항쟁 이후. 노회찬은 경인지역 노조와 노동운동 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인천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을 출범시켰다. 주대환씨와 황광우씨 등이 지도부를 구성했고 노회찬은 조직부장을 맡았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 신지호 전 한나라당 의원, 조승수 전 진보신당 의원 등도 함께 했다.

그는 1987년 대선에서 동지들과 함께 백기완씨를 독자 후보로 내세웠다. 백기완씨는 선거 막판 야권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며 사퇴했다.

성탄 전야인 1989년 12월24일. 인민노련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던 노회찬은 공안 당국에 검거돼 구속됐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년반 옥살이를 해야 했다.

체포 1년 전인 1988년 12월 경인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해온 김지선씨와 결혼했다. 1987년 첫 만남에서 김씨에게 반해 “사귀고 싶다, 결혼하자”고 말했다가 딱지를 맞았지만 이후 연애를 이어오다가 결합한 경우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은 없다.



◆1992년 이후 진보정당 운동...“꿈깨라” 냉소도

노회찬은 1992년 만기 출소했다. 민노련 동지들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이하 진정추)를 만들어 진보정당 건설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해 4월 통합민주당을 결성해 총선에 나섰지만 참패해 해산한 뒤다. 그는 진정추의 진보정당 운동에 참여했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이어 소련 사회주의 종주국마저 무너지면서 세상은 바뀌었다. 그는 민주화 공간이 넓어지고 대중이 스스로 자신들의 얘기를 시작했으며 더이상 사회주의 혁명론이 우리 사회에 존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합법적 진보정당 운동이 미래라고 생각한 거다.

노회찬은 1992년 대선에서 백기완 후보 선거대책본부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백 후보는 대선에서 23만표(1%)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대선 참패 후 많은 이들이 진보정당 운동을 떠나갔지만, 그는 진보정당 운동을 이어가기로 했다.

“꿈에서 깨서 현실을 직시하라” “정치를 하려면 될법한 정당에서 해야지 존립여부도 불확실한 당에서 무슨 전망이 있느냐” “한국에서 진보정당은 불가능하다”…. 그가 진보 정당 운동에 나서자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렸다. 그는 “제일 괴로웠던 것은 같은 운동 진영에서 보여준 냉소와 비판”이었다(2010, 129쪽)고 회고했다.

1995년 진보정치연합 대표가 됐다. 그는 이후 △개혁신당(1996) △국민승리21(1997) △민주노동당(2000) △진보신당(2008) △통합진보당(2011) △정의당(2012) 등으로 진보정당 운동이 변하는 사이 줄곧 중심에 섰다. 진보정치의 역사가 됐다.

진정추 활동을 하던 1992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발행인으로서 『매일노동뉴스』를 발행했다. 그는 빚더미에 앉아 오랫동안 신용불량자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나중에 17대 국회의원이 됐을 때 의원용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다 이 때문에 거절당한 건 유명한 일화다.



◆“삼겹살 판갈이” 발언...민노당 10석 획득 기여

노회찬은 1997년 1월 민중들이 대선을 함께 치르고 이를 바탕으로 진보정당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 등이 호응해 국민승리21을 건설했다. 권영길씨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지만 대선에서 패했다.

하지만 국민승리21의 경험은 진보정당 창당의 동력이 됐다. 2000년 1월 민주노총과 진보정치연합 등이 결합해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것이다. 그는 민노당 초대 부대표를 맡았다.

다양한 정파가 참여하고 민주노총이 공식 지지하자 진보정당도 현실 정치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즉 민주노동당은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정당 지지율 13.03%을 얻어 무려 10석을 확보했다. 진보진영의 놀라운 성취였다. 그 스스로도 비례대표 8번 공천을 받고 당선됐다. 10선에 도전한 김종필 전 총리가 낙선했다.

2004년 3월20일 한 방송사 토론. “50년 동안 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꺼매집니다. 판을 갈 때가 왔습니다.” 좌중에 웃음이 쏟아졌고 수많은 시청자들이 전율했다. 민노당 선대본부장이던 그는 각종 토론에 출연해 서민의 언어로 촌철살인과 유머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선대본 일기’를 썼는데 나중에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출간됐고 2004년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이 됐다.

서민과 중산층의 언어로 ‘유머’와 ‘풍자’를 자유자재로 하는 그의 등장은 한국 정치의 한 진경이었다. 기존 정치권에서 들어보지 못한 민생 언어로 진보의 생각을 전파했다. 이에 김어준은 “정치적 은유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풍자 화술의 달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대한민국 정치판에 갑자기 등장했다”(2010, 16쪽)고 했다.



◆성공과 좌절...3선 진보진영 대표주자로

노회찬은 국회 입문 1년만인 2005년 삼성 X파일이 공개되자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진 검사 7명의 이름을 공개했다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대선 패배 직후인 2008년 비대위의 혁신안이 민노당 내 ‘자주파’의 반대로 부결되자 심상정 등과 함께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하지만 진보 진영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분열하면서 18대 총선에서 진보신당은 참패하고 그 자신도 낙선했다. 2009년 서울시장에 출마했다가 3위에 그쳤다.

노회찬은 2011년 심상정, 조승수 등 진보신당 탈당파와 유시민의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과 결합해 통합진보당을 결성했다. 통합진보당은 2012년 4월 제19대 총선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13명의 국회의원을 탄생시켰다. 그도 서울 노원병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총선 직후 이석기 사태가 발생하면서 심상정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탈당해 정의당을 창당하고 대표에 취임했다.

재선 9개월만인 2013년 2월. 노회찬은 떡값 검사 리스트를 공개한 것과 관련해 대법원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의 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는 양승태 대법원의 결정에 대해 “시대착오적 궤변”이라며 “폐암환자를 수술한다더니 암 걸린 폐는 그냥 두고 멀쩡한 위를 들어낸 의료사고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비판했다.

2014년 7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가 패배한 그는 2016년 4월 제20대 총선에선 경남 창원성산에서 출마해 극적으로 당선됐다. 심상정과 함께 3선을 기록하며 진보진영의 대표주자로 우뚝 섰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 호주제 페지와 장애인 차별금지, 대체복무, 고교 무상교육 등을 담은 법률안 900여건을 비롯해 1000여건의 의안을 발의했다. 많은 진보적 의제들이 그와 동료에 의해 법률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약자 대변, 진보정당 견인...“진보이지만 유연”

우리는 다시 근원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과가 분명히 드러났는데도, 대한민국은 왜 노회찬의 죽음에 통곡하는가. 그의 삶은, 존재는, 생각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먼저 노회찬은 노동과 복지, 약자를 중시하는 확고한 진보적 신념의 소유자였다. 또 진보정당의 안착을 이끈 스타 진보 정치가였다. “노회찬이 있었기에 심상정이 있었다”는 말이 결코 과하지 않다는 평가다. 신념과 원칙, 민중지향성을 가지고 진보 정치를 개척해온 그였다. 온몸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신념을 2012년 정의당 대표수락 연설에서 찾아보시라.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서울시 구로구 가로수 공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서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대략 2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이 버스는 새벽 4시 정각에 출발합니다. 새벽 4시에 출발하는 그 버스와 4시 5분경에 출발하는 그 두 번째 버스는 출발한 지 15분 만에 신도림과 구로 시장을 거칠 때쯤이면 좌석은 만석이 되고 버스 사이 그 복도 길까지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바닥에 다 앉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집니다. 새로운 사람이 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매일 같은 사람이 탑니다. 그래서 시내버스인데도 마치, 고정석이 있는 것처럼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타고, 강남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내리는지, 모두가 알고 있는 매우 특이한 버스입니다. 이 버스에 타시는 분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을 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각이기 때문에 매일 이 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 분이 어쩌다가 결근을 하면 누가 어디서 안탔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그 누구도 새벽 4시와 새벽 4시 5분에 출발하는 6411번 버스가 출발점부터 거의 만석이 되어서 강남의 여러 정류장에서 5·60대 아주머니들을 다 내려준 후에 종점으로 향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분들이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에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고 있는 줄 의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 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지금 현대자동차, 그 고압선 철탑 위에 올라가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물세명씩 죽어나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용산에서, 지금은 몇 년째 허허벌판으로 방치되고 있는 저 남일당 그 건물에서 사라져간 그 다섯 분도 역시 마찬가지 투명인간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들은 아홉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유시민을 모르고, 심상정을 모르고, 이 노회찬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그 누구 탓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이 진보정당,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위해 존재할 때, 그 일말의 의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진보 정치인임에도 현실 정치인 누구보다도 유연했다는 점은 두고두고 진보 진영의 자산이 될 것이다. 진보이되 극단을 피했고,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끊임없이 공존을 모색한 그였다. 권력과 이익을 좇는 당파 패거리 정치로 스스로 몰락한 보수 진영에서조차 ‘보수에도 노회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앞으로 진보가 미래를 개척할 때 그의 모습은 많은 영감과 무기를 줄 것이다. 2014년 인터뷰에서 보여준 유연함이란.

“어렵다 하더라도 진보정당은 진보정당의 길을 가야 한다. 더디다 해도 진보정당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난 여전히 믿고 있다. 진보정당이 독자적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장기적인 발전 전략을 동원해야 한다. 그 중 하나가 야권연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야권연대에 기대지 않으면 잘하는 거고 야권연대에 기대면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선악의 문제, 도덕 윤리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정치는 그렇게 손에 꽃가루만 묻히면서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냉정한 정치 세계에서 야권연대도 주고받을 게 있으니까 성립하는 거다. 민주노동당 때 우리 힘만으로 법안 하나 내기 힘들면 다른 당과 입법공조를 했다. 이거 하나는 반드시 통과시켜야겠다고 하면 몇 개를 양보하더라도 그렇게 했다. 그런 정치 영역에서 장기적이냐, 연속적이냐, 일시적이냐, 좀 깊이 가느냐, 얕게 가느냐 등 여러 차이가 있지만 연대와 공조는 일상적인 셈법이라고 본다.”(2014, 31쪽)

◆“정치문화 균열 유머와 풍자야말로 노회찬 혁명”

이념과 당파의 차이를 넘어서는 인간적인 매력도 많은 이들에게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한 것으로 보인다. 외골수로 주장하고 소리만 치며 비인간적이라는 기존 진보의 이미지를 일거에 무너뜨린 담대함과 소탈함, 넓은 품을 보여줘서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구분 없이 그를 조문한 이유이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전철 교수)가 된 배경이다.

마지막으로 노회찬의 진정한, 최대의 공(功)은 서민의 언어로 한국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뒤흔든 ‘유머(humor)’와 ‘풍자(satire)’라고 생각한다. 여야 또는 진영간 목숨 건 극한 대결과 분노, 증오가 살풍경하게 펼쳐진 민주화 도정에서 그는 ‘불판을 갈아엎자’는 류의 유머와 풍자로 우리 사회 전반의 균열을 가져온 하나의 혁명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의회정치보다 더 멋진 정치풍자, 한국 정치를 한단계 올려 놓은 풍자”(임채원)라는 평가조차 나온다. 단순히 촌철살인의 차원을 넘어선 진정한 ‘노회찬 혁명’이었다. 사람들은 벌써 서민의 언어로 이뤄진 그의 유머와 풍자를 그리워하는 것이다(2018. 7. 29).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정호승의 <봄길> 중에서)

*이 글의 직접 인용 가운데 페이지가 기록된 것은 모두 『진보의 재탄생』(2010, 꾸리에북스)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2014, 바이북)에서 가져왔음을 밝힌다.
김용출 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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