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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 드라이기 한우물 … 베풂만큼은 손 닿는 곳마다 [나의 삶 나의 길]

입력 : 2018-10-27 15:00:00 수정 : 2018-10-27 1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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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위 이·미용기기 업체’ 이충구 유닉스전자 회장/자본금 1000만원으로 회사 차려/1978년 ‘사업 한번 해보자’ 결심/
잘나가던 직장 상무직 박차고 퇴사/日 가니 드라이기 눈에 띄어 도전/배우 차인표 부친이 ‘유닉스’ 작명/차수웅 회장은 내 고등학교 절친
이충구(77) 유닉스전자 회장은 국내 헤어 드라이기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본금 1000만원으로 회사를 차려 40년 만에 국내 1위 미용기기 업체로 우뚝 세웠다. 1978년 수입품 판매 보따리상을 시작으로 1980년에 일본에 헤어드라이어를 처음 수출하고, 1984년 자체 드라이어를 개발했다. 1997년 국내 최초 이온 헤어드라이어로 국내 시장 점유율 60%를 기록했고, 이후 원적외선 드라이어를 잇달아 선보이며 세계 드라이어 시장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유닉스전자의 기술력은 독일 ‘GFK 아시아 1위 브랜드’ 2회 연속 수상, ‘한국산업브랜드파워 1위’, ‘2005 세계 일류상품’ 선정 등으로 국내외에서 입증됐다. 창립 40주년을 맞는 올해도 ‘에어샷 플라스마시스템’이라는 혁신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그야말로 ‘드라이 인생’ 40년이다. 

이충구 유닉스전자 대표회장이 지난 17일 서울시 용산구 유닉스전자 서울 사무소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헤어 드라이기’사업에만 40년 한우물을 파고, 미래세대를 위한 사회공헌에 공을 들이는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사업에서는 한 우물을 판 이 회장이지만 사회공헌만큼은 문어발식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 회장은 2016년 서울대어린이병원에 중증 난치 소아환자 치료에 써 달라며 기부금 3억원을 약정했고, 2006년에도 저소득층 소아신경질환자 지원을 위해 3억원을 후원했다. 모교인 성균관대에 1999년부터 ‘생명과학과 이충구 장학기금’을 지원하고 있다. 올 3월에는 국제의료봉사단체 스포츠닥터스와 함께 빈곤국을 대상으로 한 의료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교육환경 개선과 구축을 위한 나눔활동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면서 올해 ‘제23회 인간상록수’로 추대됐다.

기자는 이 회장을 지난 17일 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한 유닉스전자 서울 사무소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드라이기’로만 달려온 외길 인생 40년이다.

“벌써 40년, 세월이 빠르다. 초창기에 사업을 시작할 때는 정말 어려웠다. 부품이 없어서 대만이나 홍콩, 일본에서 조달받아 만들었다. 솔직히 처음에 만든 제품은 조잡했다. 이후에도 일본 제품과 비교하면 조잡하다는 생각에 자존심을 갖고 더 잘 만들어야겠다고 노력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렇지만 제품 만드는 기업인 입장에서는 늘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40년도 후배들이 더 잘해 줬으면 한다.”

―헤어 드라이기를 택한 이유는.

“대학을 졸업하고 1965년 호남전기에 입사해 상무까지 올랐다. 그러다 어느 날 ‘내 사업을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두고 나와 처음에는 일본을 오가며 섬유쪽도 해보고 무역도 해봤지만 적성이 안 맞았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과 연결된 사업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일본을 오가며 보니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여자들이 직장에 다니는 경우가 늘면서 ‘구루구루 드라이기’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일본 백화점 등에 진열된 제품을 살펴보니 나쇼날과 도시바, 산요 등 업체들이 너도나도 이 제품을 다 만들고 있었다. 그 제품을 전부 사 가지고 와서 연구해 가면서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1978년 창업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헤어드라이어란 걸 보기 어려웠다. 있더라도 일부 외국산 제품이 시장을 선점했는데,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늘면서 헤어드라이어가 필수 생활가전이 된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초기 제품 개발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당시만 해도 드라이기에 들어가는 모터 하나 변변한 우리 제품이 없는 실정이었다. 열 제어기도 없고, 열선도 헤어 드라이기 제작에 맞는 가느다란 것이 없어 일본이나 대만에서 가져와 만들었을 정도다. 가까스로 제품을 만들어보면 바람이 손잡이에서 새어 나오고, 드라이기가 열로 비틀어지기도 해서 적잖이 애를 먹었다. 처음에는 헤어 드라이기가 간단한 줄 알았는데 그 안에 60가지 부품이 들어가더라. 특히 전기 쇼트라도 나서 드라이기에 불이라도 나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전깃줄이 끊어져서 화재가 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일본 업체도 자기들이 15년가량 제품 만든 경험을 전해주면서 사고도 많고, 그에 따른 변상도 많으니 조심하라고 조언할 정도였다.”

―초기 제품에 대한 시장 반응은 어땠나.

“제작에 들어간 지 1년반 정도 걸려 첫 제품을 내놨다. 처음에는 솔직히 조잡했다. 만들어서 일본에 가져갔더니 ‘이런 제품으로는 일본 시장에서 환영 못 받는다’고 퇴짜를 맞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겨우 시작이다. 일본에서 이런 것을 잘 만드는 회사랑 합작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사정했다. 나쇼날은 큰 기업이라 중소기업하고는 거래할 수 없다며 자회사를 소개해 줬다. 그렇게 어렵게 교류가 시작됐고, 이후 신뢰가 쌓이면서 합작까지 할 수 있게 됐다. 이때 ‘다 배워 오자’란 심정으로 품질부터 생산관리, 기술 등을 열심히 이전받았다.”

―40년 전 작명한 ‘유닉스전자’라는 사명은 지금 들어도 세련된 느낌이다.

“유닉스는 남녀겸용 또는 의상이나 머리 모양 등에서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없어지는 현상을 의미하는 ‘유니섹스(Unisex)’에서 비롯됐다. 남녀노소 누구나 편리하게 사용하고 이를 통해 삶을 더욱 아름답고 건강하게 향상시킬 수 있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기업은 이름이 중요하다. 회사 작명을 고민하다가 고등학교 절친인 차수웅 우성해운 창업주(배우 차인표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다. 당시 차 회장은 사업차 독일과 같은 선진국을 많이 오갈 때라 글로벌 감각이 있었는데 ‘유닉스’로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 줬다. 차 회장이 은인인 셈인데 지금도 차 회장과는 자주 만난다.”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게 된 계기는.

“아무리 제품을 잘 만들어도 결국 잘 팔아야 한다. 최대 시장인 미국 라스베이거스쇼에 가서 누구에게 팔아야 하나 정말 고민했다. 그즈음에 누군가 유태인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지인을 통해서 유태인을 소개받았다. 그 유태인은 색조 화장품과 염색약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지인의 소개로 1년간 교류하게 됐다. 그는 우리 시스템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1000만달러짜리 독점계약을 체결해 줬다. 2004년 당시만 해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 자금으로 공장설비 등을 보완하고, 충북 제천에 그쪽 납품만을 위한 공장을 별도로 만들었다. 그 결과 5만개를 수출했는데 갑자기 제품에 불량이 있다는 ‘컴플레인’이 들어왔다. 공장장과 즉시 미국에 달려갔다. 가서 살펴보니 불량품이라 하기에는 애매한 한계선에 있는 상황이었다. 그쪽에서는 전부 리콜해야 한다고 했다. 고심을 거듭했다. 5만개 제품을 모두 리콜하면 20억원의 손실이 날 판이었고, 당시로서는 그렇게 되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품질에 대한 신뢰가 우선이었다. 그 자리에서 리콜을 전부 받겠다고 답했다. 결과론이지만 나중에 그쪽에서 품질 선별팀을 보내라는 수정 제안을 통해 7% 정도만 리콜하는 것으로 타협됐다. 그런 고비 끝에 미국 수출이 잘 이뤄졌고 수출기반이 생기면서 제품의 품질이 급속히 좋아졌다.”

―40년을 이어온 경영철학은 무엇인가.

“거창하게 경영철학이랄 것은 없지만 품질이 최고가 아니면 소비자들이 외면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돈을 벌어서 단순히 부자가 된다는 목표보다는 우리가 만드는 제품을 열심히 정성껏 만들자고 늘 직원들에게 당부한다. 만약 고객이 제품에 대해 항의하면 애프터서비스팀에 따뜻하고 친절하게 응대하라고 강조한다. 내 가족이 가져온 것처럼 대하라는 것이다. 고객이 기다리는 동안 차라도 한잔 내주는 사소한 배려가 고객의 신뢰를 얻는 동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회사에서 ‘밥차’를 운영하며 어려운 이웃에 도움을 주고, 김포공장 근처의 장애인을 지원하는 것도 사업으로 돈을 버는 데만 몰두하지 않고 남을 돕는 데서 보람을 찾자는 것이다.”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아 ‘토탈 뷰티 플랫폼 기업’으로의 진화를 선언했다.

“제조업체에 머무르지 않고 ‘종합 뷰티 서비스 기업’으로 변신하자는 것이다. 헤어 드라이기 판매만으로는 외형 성장에 한계가 있다. 제품과 서비스업을 연계한 플랫폼 시스템을 도입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제품과 플랫폼, 서비스를 통합해 일반 소비자뿐 아니라 헤어샵 등 전문가층도 아우르는 토탈 뷰티 서비스 기업으로 거듭나자는 주문이다.”

―미래 인재양성을 지원하는 데 적극적이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이다. 1·4 후퇴 때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피난을 왔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어렵게 공부했다. 나중에 성공하면 고학생을 위해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최근에 모교에서 운영 중인 ‘후배 사랑 1000원 학식’에 3000만원을 보탰다. 원래 밥값이 2500원인데 대학 선배들이 돈을 보태 1000원에 먹을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대학 시절 끼니를 거르다 도시락 하나를 셋이 나눠 먹던 기억에 기부에 참여했다. 장학금을 주면 감사편지가 잘 안 오는데 아침밥을 주니 학생들이 편지를 많이 보낸다. 찾아와서 고맙다고 하기도 한다.”

―한국상록회로부터 사회공헌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23회 인간상록수’로 추대됐다.

“50년 동안 이어진 역사 깊은 한국상록회 인간상록수로 추대돼 영광이다. 앞으로도 유닉스전자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기업으로서 다양한 분야 사회공헌활동에 최선을 다하겠다.”

―정부가 혁신성장을 강조하는데 강소기업 운영자로서 고충은.

“지금까지 만든 제품은 중국도, 일본도 다 같이 만든다. 똑같은 제품으로는 앞으로 생존이 불가능하다. 아마도 우리가 헤어 드라이기 중에서는 혁신제품을 가장 많이 개발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연구개발(R&D) 집중 투자를 통해 혁신적이고 차별화된 제품 개발에 중점을 두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경영자의 경영능력도 중요하지만 인재가 절실하다. 한국에서는 요즘 젊은이들이 대부분 대기업을 선호한다. 우리 같은 중견기업 입장에서는 인도와 같은 정보기술(IT)강국에서 머리 좋은 인력을 수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실제로 아파트 등을 얻어주고 인도 우수인력을 스카우트하는 문제를 고민하기도 한다. 이처럼 중소기업들이 겪는 우수인재 확보의 어려움을 풀어줄 열쇠를 정부가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후배 창업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이왕 사업을 하려면 자기가 하는 일에 미쳐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일단 한번 미쳐보고 안 되면 다시 시작하거나 다른 것을 해보라는 것이다.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보라는 것이다.”

이천종 기자 skylee@segye.com

■이충구 회장은…

●황해도 연백(1941) ●성균관대학교 생명공학과 학사 ●ROTC 소위 복무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 경영자과정 수료 ●호남전기공업㈜ 입사 ●유닉스전자 주식회사 창업 ●대한민국 ROTC 중앙회 제2대, 제3대 회장 역임 ●한국전기제품 안전진흥원 부이사장 ●한일협력위원회 부회장 ●대한민국 ROTC 장학재단 이사장 ●유닉스전자 대표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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