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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루이즈 드 라로슈자클랭 지음/김응종 옮김/3만2000원 |
프랑스혁명을 일컬어 ‘자유, 평등, 형제애’의 대명사라고 칭한다. 시민혁명의 전범으로 묘사된다. 전 세계 교과서에 난 것을 보면 ‘1792년 8월 10일 사건은 위대하다’고 되어 있다.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열어젖힌 위대한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 기록된 프랑스혁명은 광적인 폭력과 난동 그 자체였다. 대의를 내세운 시민혁명과는 거리가 멀다. 증오심에 불타는 파리 민중의 폭동이었다. 실제로 술에 취한 민중들의 복수극이었다고 저자는 기록했다. 저자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은 아홉달간의 ‘방데전쟁’에서 남편과 아버지, 어린 딸을 잃었고, 도피 중에 낳은 두 딸 역시 사망한 한을 안고 살았다. 저자는 1772년 베르사유에서 태어나 1857년 사망했다.
‘1792년 8월 10일 사건’을 사가들은 파리 민중과 연맹군이 왕궁을 공격하여, 왕정을 붕괴시키고 국민 공화정을 시작한 대사건으로 기억한다. 혁명이라고 환호했지만, 사실 곧이어 벌어진 비극적인 ‘9월 학살’과 공포정치의 전주곡이었다.
파리 민중들은 혁명 선서를 거부한 신부 270여명과 감옥에 갇힌 수인 1000여명의 목을 곧바로 잘랐다. 공포정치 와중에서 시민 5만여명이 약식 재판으로 처형됐다.
저자는 특히 프랑스 서부지역 방데전쟁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저자의 기록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고 옮긴이는 평했다. 1793년 3월부터 아홉달 동안 벌어진 방데전쟁은 ‘프랑스인에 의한 프랑스인의 인종 학살’이었다. 방데인 출신 병사들은 물론이고 여자, 어린이, 노인들을 포함하여 수십만 명의 방데인을 학살했다. 누구 손에 죽는지도 모른 채 죽어나갔다. 전체 주민의 3분의 1가량인 20만명의 방데인이 목숨을 잃었다. 방데 주민들로 이뤄진 방데군은 학살과 약탈을 금지했으나, 폭도나 다름없는 소위 혁명군은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의 폭력성은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면서부터 누그러진다. 광적인 폭력을 종식시킨 사람은 나폴레옹이었다. 1799년 11월 9일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방데전쟁에 대해 시민들의 안전과 양심의 자유를 위협했다고 인정했다.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고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도 했다.
저자를 통해 프랑스 ‘구체제’는 오랜 왜곡에서 벗어나 순수한 모습을 드러낸다. 서부의 귀족들은 교과서에 나타나듯이 농민들을 착취하는 특권지배계급이 아니었다. 혁명 시절 귀족들이 망명을 떠난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비겁하게 도망친 게 아니었다. 반혁명군에 가담하여 혁명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귀족으로서의 명예는 지켰지만 목숨은 지키지 않았다. 이런 귀족으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잘 보여준 인물이 앙리 라로슈자클랭 후작, 즉 이 책 저자의 남편이다. 옮긴이는 후기를 통해 “이 책을 옮기면서 젊은 귀족들의 명예심과 거기에서 나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감동을 받았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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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대표화가 외젠 들라크루아가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1830년에 그린 그림이다. 그림 가운데 여성은 자유를 상징하며, 한 손에는 프랑스 국기가 들려져 있다. |
저자는 농민들은 순수했다고 기록했다. 1789년 혁명 초기 방데의 농민들도 혁명을 환영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기대는 루이 16세의 처형 등을 겪으며 실망과 환멸로 바뀌었다. 그들은 착취당하지 않았기에 귀족들을 따랐다. 농민들은 성직자를 존경했다. 성직자들은 혁명군이 강요한 성직자민사기본법에 선서하지 않았다. 농민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혁명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저자는 “착취하는 귀족, 무위도식하는 성직자의 이미지는 혁명이 혁명을 정당화하려고 만들어낸 가공의 이미지였는지 모른다”고 했다. 저자 역시 농민들이 보호해 준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저자가 귀족 출신 여성이기에 혁명에 비판적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프랑스혁명은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는지, 과연 혁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게 한다.
프랑스 국민의 다수가 염원한 혁명은 헌법제정과 입헌군주정 수립이었다. 입헌군주정은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제시한 개혁 방안이었다. 전제정치를 없애는 방법은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었지 왕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저자가 겪은 1792년 8월 이후의 프랑스혁명은 무정부주의요 독재정치였다.
옮긴이는 “우리나라에서 프랑스혁명은 이념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면서 “혁명은 선이고 반혁명은 악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단순 도식이 여전히 지배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전쟁 승리만을 위해 공포정치가 실시되면서 혁명은 폭력으로 변질되었다. 프랑스혁명은 다수의 국민에게 외면당한 소수의 혁명 엘리트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면서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것인데, 이 회고록은 그러한 인식을 갖게 하는 책”이라고 평했다. 혁명이면 통한다는 한국 사회의 섣부름에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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