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가운데 일본에 천문학적 액수의 배상을 요구하는 헌법소원까지 제기됐다. 비록 이 헌법소원은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각하되긴 했으나 그만큼 현 정부 들어 두 나라 사이가 소원해졌음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헌재 "1000조 배상 요구, 헌법재판 대상 아니다"
3일 헌법재판소 등에 따르면 이모씨는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초 ‘일본이 한국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아 한국 국민으로서 기본권을 침해당했다’는 취지의 헌법소원심판을 헌재에 청구했다.
이씨는 헌법소원 청구서에서 “일제강점 하에 일본이 저지른 만행과 관련해 1000조원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은 1965년 한·일 수교 협상 당시 무상공여 3억달러, 장기저리 차관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 3억달러를 더한 총 8억달러를 일본 측에서 제공받는 조건으로 국교 정상화에 동의했다. 이른바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불린다. 일본 정부는 이를 근거로 “한·일 간에 배상 문제는 이미 다 끝났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8억달러를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얼마가 될지를 놓고선 정확한 수치가 없고 학자마다 의견이 갈린다. 적게는 약 6조4000억원부터 많게는 약 386조원까지 주장이 분분한데 대략 그 중간에 해당하는 200조∼300조원에 해당할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이씨가 요구한 1000조원은 그보다도 훨씬 더 큰 금액인 셈이다.
헌재는 이씨의 헌법소원 청구를 ‘각하’했다. 각하란 청구에 필요한 법률적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사건을 더 깊이 들여다볼 것도 없이 심리를 종결한다는 뜻이다.
유남석 헌재소장과 이선애·이종석 재판관 등 3인으로 구성된 헌재 제1지정재판부는 ”이씨는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이유로 1000조원을 받아야 한다’는 막연하고 모호한 주장만 한다”며 “어떠한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로 본인의 어떤 기본권이 어떻게 침해됐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고 각하 이유를 밝혔다.
◆일왕·연호 교체, 한·일 관계 회복 계기로 작용할까
이씨의 헌법소원 청구 및 각하는 일종의 해프닝에 가깝지만 문재인정부 들어 최악으로 치닫는 한·일 관계의 한 단면을 드러낸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지난해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일본 기업이 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하며 시작된 한·일 간의 냉각기는 해를 넘기며 아예 ‘빙하기’ 수준으로 얼어붙었다.
동해상에서 일본 초계기가 우리 해군 함정에 근접하는 등 위협적 비행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얼마 전에는 일본 정부 공무원이 인천국제공항에서 술에 취해 공항 직원한테 행패를 부린 혐의로 기소되는 일도 있었다. 당시 그 일본인은 “나는 한국이 싫다”고 소리질렀다.
이에 한·일 두 나라와 각각 군사동맹을 맺은 미국이 중재에 나섰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달 27일 한 강연에서 “(동아시아) 역내 주요 안보 및 경제 현안은 한국과 일본의 적극적 참여 없이 해결할 수 없다”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한·일이 좋은 관계일 때 한·미·일 3국 모두 혜택을 얻는다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마침 일본은 아키히토 현 국왕이 곧 물러나고 나루히토 왕세자가 새 국왕으로 즉위한다. 이를 기념해 일본 정부는 ‘헤이세이’(平成·평성)라는 기존 연호를 대체할 새 연호 ‘레이와’(令和·영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새 연호를 소개하며 “아름다운 마음을 모아 문화를 태어나게 하고 키우자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외교부는 일본의 새 연호 발표에 대해 “한·일 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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