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석달여 침묵을 깨고 다시 대화의 장으로 나오겠다고 밝히면서 전제 조건으로 내건 ‘새 계산법’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관심이 쏠린다. 전문가들은 비핵화와 체제 안전 보장이라는 양대 축을 놓고 북·미 간 협상이 치열할 것으로 전망했다.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9일 밤 미국과의 대화 의지를 밝히며 “나는 미국 측이 조·미(북·미) 쌍방의 이해관계에 다 같이 부응하며 우리에게 접수 가능한 계산법에 기초한 대안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고 믿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만일 미국 측이 어렵게 열리게 되는 조·미 실무협상에서 새로운 계산법과 인연이 없는 낡은 각본을 또다시 만지작거린다면 조·미 사이의 거래는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10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하노이 회담 때 나왔던 포괄적 비핵화와 대북 제재 해제의 교환이라는 과거 계산법은 이제 완전히 폐기됐다”며 “북한은 완전한 비핵화와 자신들의 안전 보장을 교환 조건으로 내건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동안 북한이 중·단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이어오면서 군사적 긴장감을 높였던 것도 이번 협상을 위한 전략에 모두 포함돼 있다는 해석이다. 홍 실장은 “북한은 미국을 향해 한·미 연합훈련 중단,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중지, 주한미군 철수, 무기반입 금지, 미국의 핵정책 변경 등 5가지 군사 관련 요구를 강하게 내세우며 협상을 이끌어 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이 기회에 완전한 체제 보장을 끌어내겠다는 셈법을 세운 것이다. 홍 실장은 “하노이 회담 당시 최고 존엄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베트남까지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수모를 겪은 북한 입장에서 ‘대북 제재 해제’는 공식 안건으로 올리지 않겠지만 미국이 먼저 알아서 그 카드를 낼 수 있도록 협상 전략을 구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의 요구에 대해 미국이 한·미 연합훈련과 전략자산 한반도 전개의 영구 중단을 카드로 내밀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북한의 체제 보장 세부방법으로 미국이 하노이 때 제시한 평양 연락사무소 설치, 불가침선언, 종전선언 준비 외에도 한·미 연합훈련 중단, 전략자산 전개 영구 중단 내용을 전격 합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박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연합훈련과 전략자산 전개에 따른 비용 문제를 여러 차례 언급한 만큼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카드”라며 “이럴 경우 남한이 사실상 미국의 핵우산에서 배제되는 효과가 발생할 수 있어 우리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북·미 양측이 9월 말 평양이나 제3국에서 실무회담을 열리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로 됐지만, 일각에서는 이것이 북한의 명분 쌓기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박 교수는 “그동안 실무협상과 고위급 회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던 북한이 이는 명분 쌓기 정도로 활용하고 결국 또 다시 정상회담으로 바로 넘어가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북·미 실무협상 재개가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도 다시 재가동될지 관심사다. 현재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9월14일)나 9·19 평양 정상회담 공동선언 1주년 등 남북관계 성과와 관련한 기념일이 다가오지만 양측은 이에 대한 공동 기념식 협의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북한의 요청으로 시작된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한 대북 쌀 지원도 한·미 연합훈련에 대한 북한의 반발로 절차가 중단된 상태다.
이날 한·미 북핵협상 대표인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전화로 대북 정책을 논의했다.
외교부는 “(두 사람이) 최근 한반도 정세 및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의 실질적 진전 방안을 논의했으며, 가까운 시일 내 만나서 협의를 이어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통화에서는 북·미 협상 개최 시점이나 장소, 의제 등에 대한 간략한 논의가 오갔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 본부장은 다음 주 후반에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비건 대표와 만나는 방향으로 출장 일정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北이 쏜 발사체
북한이 10일 평안남도 개천 일대에서 동해를 향해 발사한 발사체는 개발 완성 단계의 신형 무기체계로 추정된다. 정확도와 유도기능·비행성능 등을 최종 시험하는 한편, 미국과 한국에 경고성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 대내적으로는 정권 수립일(9·9절)을 계기로 체제 결속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에 쏜 발사체의 최대 비행거리는 약 330㎞로 탐지됐다. 정점 고도는 50∼60㎞로 개천에서 동북방 직선 방향으로 비행한 것으로 분석됐다.
아직 발사체의 기종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거리와 고도 등을 봤을 때 직경 600㎜로 추정되는 ‘초대형 방사포’나 지난 7월 이후 잇따라 발사한 ‘북한판 에이태큼스’로 불리는 신형 전술 지대지미사일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동쪽 해안에서 시험발사를 한 후 자신감이 붙으면 서쪽 지역에서 동해안 쪽으로 내륙을 가로지르는 시험발사를 하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초대형 방사포와 신형 전술 지대지미사일의 경우 아직 내륙 관통 발사 사례가 없다. 북한은 지난 8월24일 함경남도 선덕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초대형 방사포를 발사한 바 있다. 신형 전술 지대지미사일은 8월 10일과 16일 각각 발사됐다.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불리는 ‘KN-23’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KN-23 단거리 탄도미사일은 지난 5월 4일 첫 시험발사 이후 최소 5번 이어졌고, 8월 6일에는 황해남도 과일군에서 동북방 방향의 내륙을 가로지르는 시험발사도 진행된 바 있다. 신형 대구경 조종 방사포는 사거리가 짧아 이번에 발사된 발사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들 4개 발사체의 사거리는 220∼600여㎞로, 평택 주한미군 기지와 육해공군본부가 있는 충남 계룡대, F-35A 스텔스 전투기 모기지인 청주 공군기지, 경북 성주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기지까지 타격이 가능하다. 특히 저고도로 비행해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체계로 요격하기 어렵다.
한편, 청와대는 이날 오전 8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긴급회의를 열고 북한이 발사한 미상의 발사체와 한반도의 전반적인 군사안보 상황을 점검했다. NSC 상임위는 보도자료를 통해 “북한이 지난 5월 이후 단거리 발사체 발사를 계속하고 있는 데 대해 강한 우려를 표한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조병욱·이정우·엄형준·김달중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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