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한국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의 오스카 제패를 비판하며 마치 ‘반면교사’인 양 거론한 미국 영화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와 ‘선셋대로’(Sunset Boulevard·1950) 두 작품이다. 이 가운데 ‘바람과…’는 한국의 젊은 세대도 제목은 들어봤을 법한 반면 ‘선셋대로’는 영화팬을 자처하는 이들조차 ‘생소하다’는 반응이 많다.
23일 미 언론에 따르면 선셋대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극찬한 작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은 물론 타인과의 대화에서도 여러 차례 이를 언급한 바 있다.
기생충처럼 아카데미 영화상을 휩쓸거나 하진 못했으나 선셋대로는 미국 영화계의 고전으로 불린다. 이번에 봉준호 감독이 시상식에서 각별한 존경심을 표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도 선셋대로를 “감추는 게 없는 영화”라고 부르며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선셋대로’, 트럼프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이 작품은 할리우드에서 무성영화 전성기가 저물고 유성영화 시대가 활짝 열린 뒤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영화배우의 삶을 그렸다. 여자주인공 노마 데스먼드(글로리아 스완슨 분)는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였지만 유성영화 등장과 함께 몰락했다. 거대하고 공허한 저택에 살면서 여전히 자신이 스타라고 착각하며 언제든 재기할 수 있다고 믿는 독특한 캐릭터다.
영화는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던 노마가 살인사건 용의자로 경찰에 체포되며 끝을 맺는다. 현실과 영화를 혼동한 노마는 자신이 체포되는 상황을 새로 촬영을 시작한 영화의 한 장면으로 착각한다. “무슨 장면이죠? 어떻게 하면 되죠?” 한물 간 배우 노마가 단숨에 부릅뜬 눈으로 진심을 다해 연기하는 마지막 모습은 미국 영화사에서 ‘명장면 중의 명장면’으로 통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이 장면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블룸버그 통신의 칼럼니스트로 트럼프 대통령에 관한 책을 집필한 시사평론가 티모시 오브라이언은 한 칼럼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트럼프와 함께 비행기로 이동하는 동안 기내에 설치된 화면으로 영화 ‘선셋대로’를 본 적이 있다. 트럼프는 이 영화의 결정적 장면인 노마가 절규하는 마지막 대목에서 몸을 기울여 내 어깨에 몸을 기대고선 ‘이거 정말 놀라운 장면 아닌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라고 말했다.”

◆1970년 브로드웨이 연극에 조연출 참여도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을 비판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뉴욕타임스(NYT)가 ‘트럼프 대통령이야말로 백악관에 들어간 기생충’이란 취지의 칼럼을 실은 것을 비롯해 워싱턴포스트(WP), CNN 등 주요 신문과 방송이 일제히 비판을 쏟아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때 영화 제작자 지망생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같은 영화계와의 불화 또한 ‘아이러니’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대목이다.
위에 소개한 시사평론가 오브라이언에 따르면 트럼프는 18세 때 영화 제작자가 되는 꿈을 꿨다고 한다. 오브라이언은 “그(트럼프)는 1964년 뉴욕군사학교를 졸업한 뒤 남가주대학(USC)에 진학해 영화 제작을 전공하는 것을 잠시 고려했었다”며 “설령 그렇게 했더라도 결국은 아버지가 하던 부동산 사업으로 끌려가고 말았을 것”이라고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영화를 비롯한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을 끝내 놓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영화는 아니지만 24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이던 1970년 브로드웨이 연극 ‘파리 이즈 아웃(Pris Is Out)’에 조연출로 참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 연극은 흥행에 참패했고, 미 언론들이 두고두고 트럼프 대통령를 조롱하는 소재가 되는 얄궂은 운명에 처해졌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