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소주’는 직접 마셔보지는 못했어도, 이름을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그 많은 소주 중에 왜 안동소주가 그렇게 유명한 것일까. 언제 그 이름을 알린 것일까.
안동소주라는 이름은 문헌에 없다. 다만 안동에서 쓰인 조리서에 소주 빚는 법이 기록돼 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중종 때 안동의 유학자 김유가 쓴 한문 필사본 요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 안동 장씨라 불린 장계향이 쓴 한글 최초 조리서 ‘음식디미방’(閨壺是議方), 1700년대 작자 미상의 한글 조리서 ‘온주법’(蘊酒法)이란 책에 소주 제조 방법이 나와 있다. 결국 안동소주라는 이름보다는 안동에서 소주를 많이 마시니 자연스럽게 안동소주란 이름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안동소주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는 아니다. 당시만 해도 지역의 술이 아닌 집안의 술이었다. 그러면 언제 본격적으로 등장했을까.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일제강점기 시절이었다. 1920년 안동 최대의 부호인 권태연은 안동 남문 184의 800평 대지에 소주공장을 세운다. 공장이름은 ‘안동주조회사’. 그 소주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제품명은 바로 ‘제비원표 안동소주’. 제비원 소주는 상품화된 안동소주의 효시이자, 대량생산의 길을 연 소주다.
1950년대의 술 시장은 소주업체들의 각축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특히 1954년부터 10년 동안은 이른바 ‘소주들의 전쟁’ 시기라 불린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세운 풍국주정, 명성 양조장의 스타 위스키, 삼미 소주, 백구 소주 등이 대표적이다. 제비원 소주는 주인이 바꿔가면서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1965년 전후로 엄청난 시련을 겪는다. 먹을 곡물이 부족해지다 보니 정부에서 쌀 등의 곡물로 술을 빚지 못하게 했던 것. 그래서 소주업체들은 획일화된 주정에 물을 희석하고 조미료로 맛을 만든 ‘희석식 소주’로 발 빠르게 생산하고, 그 결과 한국의 소주 문화가 바뀌게 된다.
제비원 소주 역시 처음에는 증류식 소주로 출시됐다가 결국 희석식으로 바뀐다. 그리고 안동에서 만들던 것을 대구의 ‘경북소주공업’이란 곳에서 만든다. 그렇게 명맥을 유지하던 안동주조회사는 1970년 국세청의 양조장 통폐합 시정 등 여러 가지 이유로 1974년 금복주에 통폐합을 당한다. 결과적으로 자본 집약적인 소주 산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전후로 전통 소주는 잃었던 명맥을 하나씩 찾고자 하는 노력이 이뤄졌다. 전 세계에 소개할 우리 전통술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대표적으로 복원된 술이 ‘문배주’ ‘경주 교동법주’ ‘면천두견주’였다. 이 3종의 술을 빚는 법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그 외 ‘이강주’ ‘오메기술’ 등은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안동소주’의 조옥화 명인은 1987년 5월 13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이후 1995년 박재서 명인이 농식품부 식품명인으로 지정되는 등 안동소주가 다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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