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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의세상보기] 식물이 들려주는 목소리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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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11-09 23:29:31 수정 : 2020-11-09 23: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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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식물 키우고 가꾸는 동안
기쁨·위로 안겨준다는 것 실감
자연의 섭리·순리 대한 깨달음
우리 삶도 순리 따라 살아가야

코로나19로 인해 ‘방콕’ ‘집콕’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4월 초부터 500원짜리 동전만 한 크기의 거북이 세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6개월쯤 지난 지금 거북이들은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로 성장했다. 매일매일 등도 햇볕에 말려주고 때맞춰 먹이도 챙겨줌은 물론 거북이들 살아가는 데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고자 성의를 다하는 주인네 마음을 아는 듯, 세 마리 거북이의 재롱이 날로 늘어가는 중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키우고 가꾸는 동안 뜻밖의 기쁨과 예상을 넘어선 위로를 안겨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블루베리와 소나무를 키우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10년이 훌쩍 지나갔으니, 세월의 흐름은 참으로 빠르다는 말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번 코로나19 위기의 와중에 블루베리를 수확하고 소나무 가지치기를 하면서 얼마나 큰 힐링을 경험했는지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무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래도 식물들은 때 되니 꽃 피우고 벌들 다녀간 후 열매를 맺어주니, 한편으론 안심도 되었고 다른 한편으론 고마움이 샘솟듯 밀려왔다. 요즘은 소나무 가지치기가 한창인데, 여전히 끝나지 않은 거리두기 속에서나마 잡념을 잊은 채 잠시나마 불안감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식물을 가까이하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우리가 참으로 ‘사람 중심적 사고(思考)’를 당연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풍이라 쓰고 중간고사라 읽는다’고 투덜대는 학생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는 곳마다 가을 단풍이 절정이다. 너나없이 울긋불긋 곱게 물든 단풍색깔에 탄복하곤 하지만, 식물학자 이야길 들어보니 단풍은 빨갛게 노랗게 물드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이파리 속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생기는 현상이라 한다. 나무들이 겨울나기를 준비하면서 온몸의 물을 뿜어내고 나면 이파리에 남는 성분에 따라 노란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붉은색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이지만, 겨울나기에 동원되는 식물의 지혜만큼은 풍요로운 소비와 과도한 낭비에 길든 인간이 필히 배웠으면 한다는 식물학자의 조언이 귀에서 떠나질 않는다.

한때 일본에서 사회적 이목을 끌었던 ‘초식남’(草食男)이란 단어가 한국에 수입(?)된 적이 있다. 고기 대신 풀만 먹는다는 초식남 이미지는 욕망과 에너지로 충만한 남성의 정반대 이미지로서, 마치 움직이지 않는 식물처럼 불필요한 야망을 버리고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한 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일본의 젊은 남성을 표상하고 있었다. 이 초식남 이미지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오랜 불황을 헤쳐 오는 동안 불안하고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오늘의 노력과 인내를 저당잡히기보다는, 야망을 포기하고 욕망을 줄인 채 일상을 버텨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낙오자로서의 이미지가 교묘하게 덧씌워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처음엔 초식남이란 명칭이 식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실상 식물은 움직일 수 없기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생존을 위해 그 어떤 동물 못지않게 격렬한 투쟁을 한다지 않던가. 실제로 나무 농사를 시작한 첫해부터 우리 가족은 풀이 얼마나 무서운 생명체인가를 생생하게 경험한 바 있다. 묘목을 심은 상태에서 무지로 인해 잡초 제거를 게을리한 결과, 100그루의 묘목 가운데 80여그루가 풀더미에 파묻혀 고사하는 광경을 보고야 말았으니 말이다. 잡초의 생명력을 찬양했던 시인들의 시구(詩句)가 원망스러울 만큼 묘목들은 드센 풀의 습격을 받아 맥없이 죽어갔다.

그러고 보니 우리 눈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생명을 유지하고자 땅속에서 맹렬히 발버둥치는 식물 이미지를 담은 초식남은, 요즘 젊은 남성들의 상황을 절묘하게 포착한 것 같기도 하다.

현직 검찰총장을 ‘식물총장’으로 만들려 한다는 사회적 비난과 이에 대한 반응 과정에서 등장한 비유 또한 절묘하기만 하다. 손발 모두 잘린 채 숨죽인 상태에서 겨우 자리만 지키는 검찰총장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지 비판과 우려가 교차하는 가운데 ‘식물처럼 꿋꿋하게 버텨주셔야 한다’는 응원 댓글이 달렸다 하니, 식물의 생리에 정통한 비유 속에 반전의 묘미를 담아낸 듯하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키우고 기르는 일이 우리네 삶에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됨은 자연의 섭리와 순리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주기 때문이리라. 소나무 가지치기를 할 때의 기본원칙은 안쪽으로 난 가지 치고 서로 부딪치는 가지 쳐주고 아래로 향한 가지 잘라주고, 햇볕 잘 들고 바람 잘 통하게 해주라는 것이다. 기본만 지켜도 소나무는 한 해씩 나이테를 그리면서 무럭무럭 자란다는 게다. 기본에 충실하면 나머지는 그다지 걱정할 것 없듯이, 우리네 삶도 억지 부리지 말고, 무리하지 말고, 정직하게 순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으로 족하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나무는 사람 발소리를 듣고 큰다’는 말 또한 우리네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를 함축적으로 들려주는 것 같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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