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사법신뢰 바닥으로 추락
법관대표회의 무대응 석연찮아
金 버틸수록 사법부 더 망가져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앞 보도에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자진 사퇴를 촉구하는 근조화환이 100개 이상 늘어서 있다. 명예와 신뢰의 상징이어야 할 대법원장이 ‘피노키오’에 비유되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대법원장” “법복만 입은 정치꾼”으로 조롱당하고 있다. 고위 법관부터 일선 법관에 이르기까지 “사법부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국민 신뢰가 무너졌다”는 탄식이 가득하다. ‘대법원장’ 호칭을 쓰지 않는 판사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녹취록이 공개된 지 보름 만인 지난 19일 김 대법원장이 사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임 부장판사의 사표 수리에 대해 정치적 고려는 없었다”며 사퇴 요구를 일축하는 내용이었다. 그마저 국민에게 공개한 것이 아니라 법원 내부망에 올렸다. 파문이 잦아들었을까. 김 대법원장이 마지막 기회마저 놓쳤다는 비판이 거세다. ‘사과문이 아니라 설명문’ ‘마이웨이 선언’이란 냉소적 반응이 나온다.
김 대법원장은 ‘촛불혁명’의 대표적인 수혜자다. 대법관 출신이 아닌 대법원장이라는 우려가 일자 그는 “31년 동안 재판만 해 온 사람이 어떤 수준인지 보여드리겠다”고 장담했다. 취임식에선 사법부 독립을 온몸으로 지키고 ‘좋은 재판’을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임기 4년여 동안 성적은 기대 이하다.
무엇보다 김 대법원장의 거짓말은 사법 사상 최악의 오점이 될 것이다. “법률적인 것을 차치하고… 정치적 상황을 살펴야…” “탄핵하자고 저렇게 설치고 있는데 내가 수리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냐”라고 한 건 사법부의 독립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삼권분립을 훼손한 발언이다. 녹취록이 공개되자 “9개월 전 불분명한 기억에 의존해 다르게 답변한 것”이라고 말을 바꿔 도덕성의 밑바닥을 드러냈다. 앞으로 법정에서 “대법원장도 거짓말하는데…”라는 항의가 나와 판사들이 머쓱할 게다.
사법부 독립 수호 의지는 의심을 산다. 지난해 판사에 대한 정치권의 공격이 극심했지만 김 대법원장은 침묵했다. 보수단체의 광화문 집회를 허가해줬다는 이유로 담당 판사가 여권의 집중포화를 맞아도, 조국 전 법무장관 부인 정경심 교수에게 실형을 선고한 재판부가 여당으로부터 ‘탄핵 공격’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다. 사상 초유의 판사 탄핵 때도 사법부 수장으로서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다. 임명권자에게 진 빚을 갚겠다는 건가.
‘코드 인사’로 인한 부작용도 심각하다.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 등 이념과 성향을 같이 하는 그룹들이 대거 중용되면서 사법의 정치화 우려를 낳고 있다. 조 전 장관 등 주요 피고인 사건을 담당한 재판장은 이례적으로 6년째 근무하고, 정권의 기대에 반하는 무죄 선고를 한 판사들은 대부분 전보돼 뒷말이 무성하다. 지난달 ‘엘리트 판사’ 80여명의 역대 최대 규모 줄사표는 법원 내부 문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말해 준다. 경험 많고 유능한 판사들이 떠나면 그로 인한 피해는 재판받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사정이 이런데도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열리지 않는 건 석연찮다. 법관대표회의 운영진 12명 중 의장을 포함한 7명이 인권법연구회 소속인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법원 내 최대 모임인 인권법연구회는 김 대법원장이 2011년에 만들었고, 자신이 12대 회장을 지냈다. “인권법연구회가 대법원장의 전위대”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일부에선 녹취의 부적절성을 지적하지만 그런다고 김 대법원장의 잘못이 덮어지는 건 아니다. 법관대표회의는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원로 헌법학자인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는 “법관대표회의를 소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반드시 입장 표명해야 할 사안”이라고 비판했다.
이쯤되면 김 대법원장이 물러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는 “더 나은 법원을 위해 한번 잘 해보겠다”고 버티고 있다. 다른 자리는 몰라도 정의를 상징하는 대법원장이 그래선 안 된다. 일선 판사들의 열패감은 커지는데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것 아닌가. 김 대법원장은 사법신뢰 회복에 더 이상 걸림돌이 돼선 안 된다. 버틸수록 사법부가 더 망가질 뿐이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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