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전쟁통이야. 온 가족 다 동원해서 책 빼러 다니고 있어요.”
17일 오전 11시. 최종 부도를 맞은 반디앤루니스의 여의도신영증권점. 출판사 관계자들이 ‘영업종료’라 써 붙인 출입금지 라인 앞에서 오지 않는 직원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이모(64)씨는 “개점시간(오전 10시) 한참 전부터 와 있었다”며 “어제 부도 사실을 알자마자 책을 빼내려고 매장으로 달려왔다”고 말했다.
다른 출판사 직원 유모(47)씨는 “서점 직원이 와야 책을 빼던지 할 텐데…”라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부 출판사와 총판들이 이렇게 책들을 강제로 빼내가려 하면서 매장에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출판사들 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이날 오후 회원사들에 메일을 보내 무단 도서반출시 법적으로 문제될 수 있다고 안내했다. “도서 반출과 관련해 경찰이 출동했다”고 알리고 반디앤루니스를 소유한 서울문고 측이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도록 주의를 준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우리가 한번 출동한 게 맞다”고 전했다.
출판업체들이 법적 문제까지 무릅쓰고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빼내려는 이유는 ‘아픈 기억’ 때문이다.
40년 넘게 출판업에 종사한 출판사 대표이사 이모(63)씨는 “우리가 무상으로 공급한 책들인데, 부도 나면 압류가 돼 우리가 건질 수 있는 게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2017년 송인서적 부도 당시에도 채권자 측이 우리들에게 책을 가져가려면 8∼13% 가격으로 되사가라고 했다”면서 “경매에 부치겠다고 해서 우리 책을 우리가 돈 주고 가져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언뜻 이해가지 않은 상황은 출판업계의 독특한 유통 구조 탓에 빚어진다. 서점과 출판사간 서적 공급은 엄밀히 말하면 구매와 납품이 아니다. 출판사가 서점에 판매를 위탁하는 방식으로 계약이 이뤄진다. 서점은 구매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진열한 뒤, 판매된 책에 대해서만 출판사에 대금을 지불하고 팔리지 않은 책은 출판사로 반품한다.
그러다보니 서점이 부도 나면 고스란히 피해를 출판사들이 떠안는다. 서점 내에 있는 책들에 대해 은행 등 주요 채권자가 압류해 버리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은 무상으로 서점에 공급한 책들을 눈뜨고도 빼앗기는 셈이다.
출판사들은 결국 생때같은 서적들을 뺏기지 않으려고 얼마간의 돈이라도 줘서 되사오게 된다. 출판계의 오래된 병폐다.
이씨는 “외환위기로 보문당이 부도났을 때도 직원들 월급이라도 챙기려고 우리 돈으로 우리 책을 사 왔다”고 기억했다.
결국 서점의 부도로 중소형 출판사들이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는다. 외환위기 때에도, 대형 서적도매상인 보문당과 송인서림이 도산했을 때도 500여개 서점과 출판사들이 연쇄 줄도산했다. 김대중정부가 500억원을 문예진흥기금으로 긴급 지원해야 했을 정도다.
출판사 관계자들은 서울문고 경영진의 ‘무책임한 태도’를 지적하면서 화를 삭이지 못했다.
출판사 대표 이씨는 “어제 어음을 추심하는데 부도어음이라고 떠서 깜짝 놀라 서울문고 총무과에 전화했더니 아무도 안 받아 은행에 전화해서야 부도 사실을 알았다”면서 “출판문화협회도 내가 전화를 해줘서야 알았다고 하더라. 하루 전에라도 통보해 주는 게 거래처에 대한 신뢰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는 “적어도 책 반품이라도 제대로 해준다는 공지라도 띄웠으면 우리가 이렇게 온 가족을 동원해서 책 빼러 다니진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특히 반디앤루니스 측이 부도 전날에도 책주문 시스템인 ‘오더피아’를 통해 책 주문을 냈다는 증언도 있다. 반디앤루니스 직원들조차 부도를 사전에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출판사 한 대표는 “어음만기일 도래 전에 출판업계에 만기 연기 신청에 협조해 줄 수 없냐고 하면 웬만한 출판사들이 응했을 것”이라며 “합의해서 방책을 마련할 수 있는데 이렇게 처리해버리니 맨날 부도 나고 피해를 출판사가 떠안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답답해했다.
출판사 관계자들은 출판 시장의 유통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개입해서라도 출판업계의 고질적인 병폐에 수술칼을 들이대야 한다는 것이다.
“출판업에 40년 가까이 종사한 사람으로서 30년 넘게 운영한 대형서점이 이런 식으로 끝내는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길 바란다”는 이씨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이지안 기자 ea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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