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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위태로워 이혼 택했는데… 폭력남편 만나보라는 법원 [심층기획]

입력 : 2021-07-20 09:00:00 수정 : 2021-07-20 09: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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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피해자 두 번 울리는 이혼소송제도

재판 前 ‘조정’ 폭력가정 예외 없어
가사조사관, 피해자에 부부상담 강요
대면했다 2차 폭력·납치 위협 등 피해
소송 과정 ‘자녀면접교섭’ 제도도 공포
폭력 아빠 두려운 아이에게 여행 주문

법원 관계자가 피해자에 2차 가해
조정위원 “여자가 적당히 봐주지” 망언
소송자 93%가 “판사 등 인식교육 필요”
유엔 “폭력 이혼 땐 화해 강요말라” 권고
예외 인정 법안은 국회 발의됐다 삭제
“이렇게 남편이 좋아하시는데…. 이혼을 꼭 하셔야겠어요?” 20년 넘게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던 50대 A씨는 고민 끝에 이혼을 결심했다. 남편을 보는 것 자체가 두려웠던 그는 “이혼만 빨리할 수 있다면 위자료도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법원 가사조사관은 삼자대면을 강요했다. 남편이 “나는 이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 사람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 하자 조사관은 A씨에게 왜 이혼을 하냐는 투로 “남편이 사랑하는 것은 아세요?”라고 물었다. A씨는 “남편한테 맞아서 입원했던 기록과 수차례 경찰에 신고했던 기록 등을 냈지만 조사관은 남편의 말을 더 믿는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A씨는 2년째 이혼재판을 진행 중이다.


이혼소송제도가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이 되고 있다. 소송 전 거쳐야 하는 조정 과정에서 가정폭력 가해자와의 대면조사를 강요받거나 한없이 늘어지는 이혼소송절차를 거치면서 2차 가해가 벌어지는 일이 많은 것이다.

◆‘죽을까 봐’ 이혼 선택했는데…가해자 대면하라는 법원

19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전국 가정폭력 상담소에 들어오는 가정폭력 상담 건수는 2019년 기준 23만8601건으로 3년 전(17만8533건)보다 33.6%나 늘었다. 가정폭력 피해자 중 39.6%는 이혼을, 12.6%는 별거를 원했는데 별거·이혼을 결심한 이들 중 22.8%는 ‘이대로 가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의미다. 이밖에 ‘폭행 행동의 개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40.5%), ‘자녀들에게 피해가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24.1%) 등의 응답률도 높았다. 하지만 이혼은 쉽지 않다.

이혼소송은 재판 신청 전 조정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가정폭력 피해자라고 해서 예외는 없다. 피해자가 소송을 내면 혼인생활,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 등에 대한 가사조사가 시작되고, 이후 조정위원회가 열린다. 조정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비로소 재판이 진행된다. 2018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혼 과정에서는 가해자와 강제로 화해·조정절차를 거치지 않도록 할 것과 사법부 관계자들에게 관련 교육을 의무화할 것을 권고했지만 변한 것은 없다.

A씨 사례처럼 조정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대면하는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B씨에게도 남편은 ‘공포’ 자체였다. B씨의 남편은 자녀들 앞에서도 B씨의 목을 조르는 등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아이들이 “아빠 없는 곳으로 도망가서 살자”고 했을 정도다. B씨가 참다못해 이혼소송을 제기했지만 조사관은 ‘부부상담’을 밀어붙였다. B씨는 “조사관이 ‘남편은 이혼 안 한다는데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고 했다. 내 심정은 생각하지 않는 느낌이었다”고 털어놨다.

대면조사가 또 다른 범죄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2019년 8월에는 가사조사를 받던 가정폭력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일이 있었고, 같은 해 6월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가사조사를 받은 뒤 가해자가 피해자를 납치하려다 경찰에 붙잡힌 사건도 있었다.

◆소송 중 자녀면접교섭은 ‘가해자’ 위한 제도?

자녀가 있는 가정폭력 피해자에게는 ‘자녀면접교섭 사전처분 제도’(이혼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부모 중 자녀를 데리고 있지 않은 쪽이 자녀를 만날 수 있는 제도) 역시 힘들게 한다. 30대 C씨는 남편의 가정폭력으로 이혼소송을 낸 뒤 아이와 둘이 지내고 있는데, 법원에서 남편·아이와 1박2일 여행을 다녀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이와 아빠가 함께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C씨가 거부하자 조정위 관계자는 “이런 식으로 나오면 추후 양육권 지정에 불리할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 C씨는 “‘남편이 저한테 흉기까지 들었었는데 여행에서 무슨 일 생기면 책임질 거냐’고 화를 내니 그제야 조정위 관계자가 전화를 끊었다”고 토로했다.

한국여성의전화 관계자는 “자녀면접교섭 과정에서 어린 자녀를 빼앗아가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자녀를 통해 피해자 주소를 알아내는 사례도 있다”며 “법원이 ‘자녀에게는 양쪽 부모가 다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으로 자녀면접교섭권을 강요한다”고 비판했다.

가정폭력으로 이혼을 신청한 피해자나 자녀에 대해 가해자의 부부상담·면접교섭권을 제한하는 내용의 법안(가정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지난 20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법안 통과 과정에서 ‘비례원칙에 반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해당 내용이 삭제됐다.

◆“가정폭력 감수성 높이고 소송기간 단축해야”

가정폭력 피해자가 소송과정에서 만나는 사법부 구성원들이 가정폭력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해 2차 가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 3∼5월 이혼소송 경험자 297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 ‘판사·가사조사관·조정위원 등 법원 관계자들에게 성평등·성폭력예방·가정폭력예방·아동학대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응답은 92.6%에 달했다.

전국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에 따르면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조정위원으로부터 “지금은 증거가 약하니 집에 가서 한 번 더 맞아서 나와라”, “저렇게 반성하고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고 하는데 여자가 적당히 봐주는 맛이 있어야지”, “그렇게 빡빡하게 구니 때릴 수밖에 없지 않냐”는 등의 말을 들었다고 호소했다.

가사조사와 조정절차, 재판 등으로 대개 1년 이상 걸리는 이혼소송 기간이 단축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인철 이혼 전문 변호사는 “법원이 이혼 시 혼인관계 파탄 책임을 따지는 ‘유책주의’를 고수하고 있어 가정폭력을 당하고도 증거가 없어 이혼사유로 인정을 못 받는 경우도 많다”며 “혼인관계가 파탄되면 이혼을 인정해 주는 파탄주의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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