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칼럼에서 말한 ‘쾌락주의’는 직관적이고 명쾌한 주장이기 때문에 매력이 있다. 사람들은 쾌락은 그것 자체로 좋은 것이고 거꾸로 고통은 그것 자체로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들 돈이나 건강이 좋다고 생각할 텐데 그것은 돈이나 건강이 쾌락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거꾸로 거짓말이나 질병이 나쁘다면 그것은 고통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쾌락주의는 쾌락이라는 말이 주는 반감 때문에 늘 반론에 직면해 왔다. 쾌락이라고 할 때는 말초적이고 육체적인 즐거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쾌락을 유일한 좋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돼지에게나 어울리는’ 학설을 지지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먹고 마시고 자는 데서 얻는 돼지의 쾌락과 오랫동안 지적인 사람에게 향유되는 쾌락을 경험한 작곡가 모차르트의 삶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쾌락주의자도 이러한 반론을 알고 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는 평정이나 휴식의 쾌락 같은 정적 쾌락과 육체적 욕망을 만족하는 동적 쾌락을 구분하고, 전자를 추구했다.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다 보면 그 쾌락을 놓치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불안해하게 되는 ‘쾌락주의의 역설’이 생기게 되니, 고통의 부재와 같은 소극적이고 정적인 쾌락이 진정한 쾌락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근대 영국의 공리주의자 벤담의 뒤를 이은 밀은 쾌락을 평가할 때 양뿐 아니라 질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해 위와 같은 반론을 피하려고 했다. 밀에 따르면 어떤 쾌락의 양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닌 다른 쾌락을 선택한다면 그 쾌락은 질적으로 우월하다. 위에서 말한 돼지의 쾌락보다 모차르트의 쾌락을 선택하는 이유는 ‘고상한’ 쾌락이 ‘저급한’ 쾌락을 능가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쾌락 이외에 세련됨이나 고귀함과 같은 가치를 끌어들이게 되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더 이상 쾌락이 아니라 어떤 다른 것이 된다. 이는 쾌락주의자로서 후퇴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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