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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이 빼앗은 숲…멈추니 돌아왔다 [밀착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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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7-25 10:00:00 수정 : 2021-07-26 14:4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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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향한 잔혹한 칼질 ‘벌목’

제주 비자림로, 도로확장 명분 잔혹한 훼손
10m 넘는 나무들 맥없이 쓰러져갈 때마다
숲속 생명들의 세계는 송두리째 사라진다
2018년 벌목 당시 흙색으로 도드라져 있던 숲의 공백(왼쪽)이 3년 동안 천이를 거치면서 푸른 수풀로 다시 덮인 모습(오른쪽).

숲이 베어진다는 것은 실로 무참한 일이었다. 눈앞에서 10m가 넘는 나무들이 맥없이 쓰러져갈 때마다, 낮고 작은 이끼부터 높은 나뭇가지에 둥지를 튼 숲새까지 수많은 생명들의 세계가 송두리째 사라졌다. 도로확장을 명분으로 자연에 가해진 폭력의 잔혹함을 목격한 시민들은 아연했다. 애당초 ‘법정보호종 서식지가 없다’라고 기록한 환경영향평가와는 달리, ‘비자림로 숲’이라 불리는 이곳에서는 멸종위기에 처한 벼랑 끝 생물종 다수가 발견됐다. 이 같은 절차상 문제점이 드러나며 공사는 몇 차례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그 사이 코로나19가 창궐했고, 기후위기는 심화했다. 다시 여름을 맞은 비자림로 숲을 찾아 변화를 살폈다.

2018년 벌목 당시 흙색으로 도드라져 있던 숲의 공백(아래)이 3년 동안 천이를 거치면서 푸른 수풀로 다시 덮인 모습(위).
벌목 이후 3년이 지난 그루터기 모습.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있다.

비자림로는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거슨세미오름과 칡오름 사이 골짜기를 관통하는 왕복 2차선 지방도다. 지난 2018년 8월 제주도가 4차선 확장 공사를 이유로 가장자리 숲을 훼손하면서 비자림로는 섬 바깥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졌다. 다시 찾은 현장에선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3년 전 숲이 파헤쳐지며 그루터기만 남았던 자리에서 천이가 활발히 진행 중이었다. 누리장나무, 머귀나무, 제피나무, 꾸지뽕나무, 산뽕나무, 사향제비꽃, 낚시제비꽃 등 각종 초본·목본 식물들이 뿌리를 내렸다. 어린이들과 자발적 시민모임 회원들이 찾아와 심은 묘목들 또한 싹을 틔웠다. 2018년부터 비자림로 숲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이진아(38)씨는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숲을 이루는 흙의 잠재력을 보았다”면서 “‘그 흙 위로 시멘트를 붓고 길을 내고 그 위로 빠르게 달리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건네는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9년 4월 비자림로 인근 숲에서 관찰된 수컷 긴꼬리딱새(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 모습. 정밀생태조사를 통해 비자림로 공사 구간에서 복수의 긴꼬리딱새 둥지와 서식 세력권 23곳이 발견됐다.
지난 2020년 7월 비자림로 인근 숲에서 관찰된 으름난초(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
공중에서 내려다본 비자림로 공사구간 모습. 3년 동안 천이를 거치면서 푸른 수풀이 공백을 채우기 시작했다.
지난 2019년 4월 비자림로 인근 숲에서 관찰된 수컷 두점박이사슴벌레(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

숲속 동물들은 어떨까. 모니터링을 위해 거슨세미오름 방면 숲길을 걷는 동안 두견이와 팔색조 긴꼬리딱새 등 법정보호종들의 울음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지난 2019년 6월에 이뤄진 생태정밀조사와 생명다양성재단의 추가조사 결과, 비자림로 공사 구간에서는 맹꽁이, 원앙, 애기뿔소똥구리, 두점박이사슴벌레 등 법정보호종이 잇따라 발견됐다. 특히, 비자림로에 서식하는 것으로 밝혀진 붉은해오라기는 지구상에 600∼1700개체 정도밖에 남지 않은 종이다. 이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멸종취약’ 동물로 분류한 ‘판다’보다도 적은 수다. 거슨세미오름 북쪽 사면과 생태축으로 이어지는 안돌오름은 초입부터 시끌벅적했다. 도로 확장공사가 멈춘 사이 이곳에 들어선 위락시설은 관광객들에게 ‘핫 플레이스’가 되어 있었다. 숲이 유료관광지로 변모하면서 야생동물의 이동통로가 되던 공간들에 철조망이 설치됐다.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무성하게 수풀이 자라났다.
벌목의 경계에 섰던 숲의 모습.

제주도는 올 11월 공사재개를 예고했다. 지난해 5월 환경영향 저감 대책 협의를 마무리하지 않은 채 공사를 재개했다가 과태료 처분을 받고 중단된 지 약 1년6개월 만이다. 제주도의회 고용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4월21일 도정질문에서 “비자림로를 보는 시각에서 개발과 보존이라는 프레임을 걷어내고, 주민과 관광객, 도민이 공존하는 발전 사업으로 인식해달다”고 공사 재개 필요성을 강조했다. 제주도청 건설과 관계자는 “작년 6월부터 애기뿔소똥구리, 두점박이사슴벌레두 법정보호종을 포획해 공사구간 밖 ‘대체서식지’에 방사하는 등 환경영향 저감 대책을 이행하고 있다”면서 “양서류나 조류에 대한 대책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라고 밝혔다.

비자림로 인근 숲(안돌오름)이 유료관광지로 변모하면서 야생동물의 이동통로가 되던 공간들에 철조망이 설치됐다.
2021년 7월 같은 장소. 천이가 진행되며 수풀로 덮여있다.
2019년 7월 공사 재개 당시 모습. 굴착기 주변으로 나무들이 쓰러져 있다.

대체서식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입장은 대부분 회의적이다. 환경부의 ‘대체서식지 조성·관리 환경영향평가 지침’에 따르면 대체서식지 조성을 위해선 목표종에 대한 서식환경 조성 기술이 확보되어 있어야 하며, 실질적으로 목표종에 대한 생물서식공간 조성 사례가 있어야 한다.

 

 

 

곤충학자인 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은 “전 세계적으로 대체서식지가 성공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찾아보기 어렵다”며 “비자림로 만큼 높은 밀도로 애기뿔소똥구리가 관찰되는 환경은 극히 드물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지금 제주가 하고 있는 일은 이주를 가장해 생물종을 말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덧붙였다.

지난 2020년 4월 비자림로 숲이 벌채된 자리에 시민들이 심은 사람주나무 묘목.
2018년 벌목 당시 잘려나간 삼나무 그루터기 모습. 나무가 쓴 ‘역사’인 나이테에는 비자림로의 시간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를 포함한 신종 바이러스가 빈번하게 출현하는 배경에는 과도한 생태계 파괴가 있다고 말한다. 다른 생물종의 생태적 서식지를 훼손하고 침범할수록, 자연에 남아 있어야 할 바이러스가 인류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과 기후위기가 비자림로에서 숲을 밀어내는 일과 무관하다고 말하는 건 아무런 성찰이 없는 자세다. 서식지를 파괴하는 건 직접적으로 서식종을 죽이는 행위나 다름없다. 비자림로에 깃들여 사는 친구들(멸종위기종)은 이제 건들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야생 영장류학자인 김산하 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의 지적이다.


제주=글·사진 하상윤 기자 jonyy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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