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자유로웠던 동·서베를린 간 이동 차단
1989년 11월 냉전 종식에 따라 무너져내려
동서 냉전의 상징인 독일 베를린 장벽이 13일(현지시간)로 건설 60년을 맞았다. 동서독 통일 이후 베를린 장벽은 거의 대부분 구간이 철거되고 극히 일부 구간만 보존됐다. 이날 독일 국민과 외국인 관광객들은 이제 역사적 기념물로 탈바꿈한 베를린 장벽을 찾아 냉전 종식의 역사를 되새기고 그 시절의 희생자를 기렸다.
외신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동서독이 분단된 뒤에도 베를린 시민들은 소련(현 러시아)이 통제하는 동베를린 구역과 미국·영국·프랑스 3국 관리 하의 서베를린 구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그러자 자유를 갈망하는 동독 주민들이 주로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넘어감으로써 사실상 망명을 택하는 일이 흔해졌다.
위기감을 느낀 소련 및 동독 정부는 1961년 8월 13일부터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차단하는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길이가 40㎞가 넘는 이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에 동독 정부는 ‘반(反)파시즘 방어벽’이란 이름을 붙였다. 서방의 파시즘이 공산주의 진영으로 넘어오는 것을 차단한다는 의미다.
반면 서독 정부는 부끄럽다는 의미에서 이를 ‘수치의 벽’이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장벽을 따라 곳곳에 감시탑이 설치되고 거기에는 무장한 동독 경비병이 배치됐다. 이들은 동베를린에서 누군가 장벽 근처에 접근하면 ‘벽에서 떨어지라’는 경고를 했고, 행여 월담을 시도하는 이가 눈에 띄면 체포하거나 실탄 사격을 가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이래 동서 냉전이 끝난 1989년까지 이 장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살된 이만 130∼200명에 달하고, 체포된 이도 3200여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눈길을 끄는 건 서독 정부가 탈출하려는 동독 주민에게 발포한 동독 경비병 명단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베를린 장벽 너머 서베를린 지역에는 동독 경비병들의 인권침해 실태를 감시하는 요원이 별도로 배치됐는데, 그들이 총을 쏜 경비병의 신상정보를 차곡차곡 기록해둔 것이다. 이는 통일 이후 과거 동독에서 자행된 인권침해 범죄를 처단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실제로 냉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1989년 11월9일 오후 동베를린 시민들이 장벽 앞으로 몰려와 “서베를린으로 넘어가겠다”고 요구했을 때 동독 경비병들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막아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총을 든 경비병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장벽으로 쇄도하는 주민들한테 발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독일 현대사 전문가 윌리엄 스마이저는 저서 ‘얄타에서 베를린까지’에서 “어떤 (동독) 경비병도 마지막 ‘사회주의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다”며 “그들 모두는 서독이 난민에게 발포한 국경 경비병 명단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고 적었다. ‘통일 이후의 봉변’을 의식한 동독 공무원들이 극도로 몸을 사렸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남북 통일 후 그간 북한 정권에 부역한 인사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조사 및 처벌 작업을 벌여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 베를린 장벽을 지키던 동독 경비병 이름을 하나하나 수집한 서독 정부의 집요한 노력은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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