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은 인도 독립 부담, 美는 한국인 자치능력 의심”
결국 초안의 ‘즉시 독립’→‘적절한 절차 거쳐’ 후퇴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 한국은 왜 바로 독립하지 못하고 되레 남북분단의 비극을 겪게 되었을까. 이에 관한 연구에 평생을 쏟은 정치학자 출신으로 1980년대 정계 투신 이후로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외교통일 분야 핵심 브레인이 된 조순승 전 국회의원이 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거처에서 별세했다. 향년 93세.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 중앙고,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한미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에 유학했다. 1959년 미시간 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20여년간 미국 미주리대 등에서 국제정치학 교수로 활동하며 한국 정치를 연구했다.
정치학자 시절 고인이 천착한 가장 중요한 연구 과제는 다름아닌 카이로 회담이었다. 2차대전 도중인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이 만나 전후 처리 방안을 의논한 이 회담은 당시 일본 식민지이던 한국의 독립에 관한 논의가 처음 이뤄졌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카이로 회담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미국의 대한(對韓) 통일정책’은 바로 고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다. 미·영·중 3국 정상의 카이로 선언 초안에는 일제 패망 후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처칠의 반대에 부딪혀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독립시킨다는 다소 애매한 표현으로 수정되고 이것이 최종 채택됐다.
고인은 이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라는 용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파헤쳤다. 고인이 국내 언론 등에 밝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초안을 만든 곳은 미국 국무부였고 당시 한국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 장제스 측도 기꺼이 동의했다. 그런데 영국 외무부가 ‘절대 불가’ 입장을 고수하면서 결국 영국 의도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고인은 “당시 영국이 2차대전 종전과 동시에 한국 독립을 인정한다면 자기네 식민지 인도에서도 같은 요청이 나올 것이 두려워 수정을 고집한 것으로 풀이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미국의 루스벨트도 오랜 식민지 생활을 경험한 한국인에게는 일정한 기간의 정치적 학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과 함께 수정에 동의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라는 전제조건은 훗날 유엔 신탁통치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한반도 북부에 포진한 신탁통치 찬성 세력과 남부의 반대 세력이 격렬하게 대립하다가 그만 남북분단으로 이어진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고인은 1987년 6·29선언을 계기로 한국이 민주화하면서 미국에서의 학자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서 DJ 곁으로 갔다. 비록 DJ는 대통령이 되는 데 실패했으나 이듬해인 1988년 그가 이끌던 평화민주당이 총선에 이겨 제1야당 지도자로 부상했다. 고인도 1988년 13대 총선에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15대까지 내리 3선을 기록했다. 이 기간 야권 최고의 외교통일 전문가로 자리매김한 고인은 DJ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DJ의 대북정책인 ‘햇볕정책’의 최초 입안자가 고인이란 증언도 있다. 고인의 손아래 동서인 정대철 전 의원은 “1990년대 초에 고인이 나랑 같이 DJ를 만났을 때 이솝우화 얘기를 하면서 ‘햇볕정책’이란 말을 처음 했다”며 “고인은 그 전부터 여러 글에서 이 표현을 사용했다”고 소개한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후보이던 시절 외교담당 고문으로 활동한 고인은 노무현정부 출범 후 공직을 맡는 대신 경기학원 이사장(2006∼2008)을 지냈다. 저서로 ‘한국분단사’(1982)가 유명하다. 자녀로 조영미·권익씨가 있다. 정 전 의원은 심각한 국내 코로나19 상황 등을 감안한 듯 “2월 말쯤 국내에서 고인의 추도식을 열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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