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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시선] 적과 동반자 - 상식, 규칙, 신뢰와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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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3-09 00:12:09 수정 : 2022-03-09 00: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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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사이는 적이 아닌 국정의 동반자
내로남불 말고 문명화된 민주정치 실현을

사실인지 혹은 해학인지 몰라도 영국 하원에 이런 일화가 있다고 합니다. 의욕에 가득 찬 초선의원이 첫 연설을 하면서 상대방 의원석을 향하여, “저편에 앉아 있는 우리의 적들은 …”이라는 표현을 구사하였습니다. 연설을 끝내고 자리에 앉자 옆에 있던 다선 의원이 조용하게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저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자네의 적이 아니라 동반자이고 자네의 적은 바로 자네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친구와 적을 제대로 정의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유민주주의와 독재 혹은 전체주의가 확연하게 구분이 됩니다. 전자에서는 정권을 놓고 다투는 여야의 사이는 적이 아니라 국정을 함께하는 동반자이어야 합니다. 후자의 경우 정적은 그야말로 없애야 하는 적입니다. 이번 정권 초기 어떤 분이 야당을 “궤멸시켜야 한다”는 발언을 하시는 것을 보고 매우 우려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우려가 적어도 상당한 정도로 현실이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

이런 이야기는 실은 사람들이 오랜 시일에 걸쳐 조금씩 문명화하면서 깨닫고 실천에 옮겨온 일입니다. 말하자면 권력을 놓고 서로 싸우면서 권력을 쟁취한 승자는 패자를 죽이든지 그야말로 ‘궤멸’시키는 잔혹한 역사를 되풀이해오다가 그런 일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깨달으면서 조금씩 실천에 옮겨온 개명한 조치였습니다.

“돋아나는 백발은 바람을 물들이고/ 목이 잘리면 피로 물든다.” 일본의 문인 나쓰메 소세키가 잔혹한 형벌의 현장인 런던 타워를 방문했을 때 정권 투쟁에서 패한 자의 운명을 묘사한 시 구절 하나를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점차로 사라집니다. 영국의 경우 18세기 전반에 이미 “폐하의 충성스러운 반대당”이라는 표현이 등장해서 정치의 중요한 용어로 자리를 잡습니다. 정치권력을 위한 투쟁에서 패배하더라도 생명은 물론 신체적 자유나 사회적 지위 등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재도전의 기회도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오늘날에도 이런 문명화된 정치를 향유하는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자유민주 정치를 시행하고 있는 몇 나라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특히 최근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정치의 현재와 앞날에 관하여 많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해 주로 정치인들을 탓하면서 한편 기대도 합니다. 혹은 우리의 정치 제도들을 새롭게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도 합니다.

저의 생각은, 제도의 개혁이나 좋은 정치인에 대한 기대보다 우선은 우리 자신이 문명된 정치를 위하여 필요한 여건들을 생각하고 이들을 실현할 궁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좋은 정치가 좋은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회가 좋은 정치를 이끌어 내는 것이 바른 순서라는 생각입니다. 좋은 사회와 좋은 정치를 위한 조건들을 몇 가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상식의 공유입니다. 둘째는 같은 규칙을 함께 지키는 것입니다. 셋째로, 경쟁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와 존경입니다. 모두가 말하기는 쉬워도 실현하기는 어려운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의 충족은 문명된 민주정치의 실현에 불가결한 것이며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이 손상이 된 것들입니다. 그 증거가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내로남불” “아시타비(我是他非)” “묘서동처(?鼠同處)” 같은 말들입니다.

며칠 전 US오픈 테니스를 보다가 부러운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결승전에서 패배한 세계 1위 선수가 자신을 이긴 젊은 도전자에 대하여, ‘승자가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춘 선수’라고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 정치에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건국 이전부터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해서 수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오늘날 세계가 평가하는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거의 기적입니다. 이제 또 한 번의 기적을 기대합니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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