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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유적탐방] 중인 문화의 중심, 송석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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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7-01 22:53:18 수정 : 2022-07-01 22: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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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에 위치한 박노수 미술관.

최근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인근 서촌과 북촌에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의 서촌은 조선 후기 중인(中人) 문화의 중심 공간이었다. 양반과 평민 사이에 위치한 중인은 기술직 종사자, 중앙 관청의 서리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중인들은 모임을 개최하여, 시와 문장을 서로 겨루는 시사(詩社) 활동을 하였다. 중인 활동 중심이 된 곳은 시인 천수경이 주인이었던 송석원(松石園)으로, 그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다. 장동 김씨와 여흥 민씨를 거쳐 1910년쯤에는 친일파 윤덕영이 송석원을 소유하였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후 윤덕영은 1914∼1915년 서촌의 옥인동 땅의 절반 이상을 사들였다. 그리고 옛 송석원 자리에 프랑스풍 양관(洋館)이 중심이 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저택을 지었다. 벽수산장은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규모가 엄청났지만, 사람들은 이를 조롱하여,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렀다. 윤덕영 사후에 벽수산장은 미쓰이 광산 주식회사에 매각되었고, 해방 후에는 덕수병원에 귀속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는 미8군 장교 숙소로, 1954년 6월부터는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본부로 쓰이기도 했다. 1966년 화재로 본부는 이전하였고, 1973년 도로정비 사업으로 벽수산장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벽수산장 남쪽에는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지은 2층 벽돌집이 있었다. 1930년대 근대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것으로, 한식과 양식의 기법에다가 일본식과 중국식이 섞여 있는 독특한 형태였다. 이 집은 1972년부터 박노수(1927~2013) 화백이 소유했는데, 화백의 사망 후엔 집과 함께 미술작품들이 종로구에 기증되었다. 2013년에는 ‘박노수 미술관’으로 개관하면서 서촌의 또 다른 명소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조선 후기 중인 문화의 중심지가 현대에도 계승되고 있는 느낌이다. 박노수 미술관 주변에서는 시인 이상이 20년간 살았던 집터에 자리한 ‘이상의 집’, 윤동주가 하숙했음을 알려주는 윤동주 하숙집 표지판도 찾아볼 수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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