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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하가람

여름은 해가 길었고 우리는 시원한 곳을 찾아다녔다. 도시의 많은 이가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꽃집을 겸하는 카페와 일본식 정원을 가진 대형 카페는 만석이어서 우리는 빈자리를 찾아 더운 거리 구석구석을 헤맸다. 거리에 그토록 카페가 많은데 모두 사람이 차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다섯 번째로 방문한 카페도 마찬가지로 실내에 앉을 곳이 없었는데 테라스 자리만 텅 비어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우리는 그늘에서 쉴 수 있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직원이 아이스커피와 주스를 내올 때까지 우리는 노란 차양 아래 앉아 날씨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오늘은 어제보다 덥다, 어제는 그제보다 더웠는데, 내일은 오늘보다 더울지도… 그건 우리가 사흘 전에도 일주일 전에도 나눈 비슷한 이야기, 이야기라기보단 한탄에 가까웠다. 열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 탓에 숨이 막힐 것 같았고 간간이 불어오는 더운 바람은 말문을 막히게 했다. 바 형태의 테라스 자리는 카페 바깥쪽을 향해 일자로 놓여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아닌 도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도로 건너편에서 양산을 쓰거나 이동식 선풍기를 들거나 아무튼 벌그스름한 얼굴로 걸어가는 모든 행인을 보았다.

지루하다.

문득 떠오른 문장에 놀랐다. 나는 초원과 함께 있을 때 늘 편하다고만 생각했지 따분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초원을 보았다. 흰색 볼캡을 쓴 초원은 여전히 도로 건너편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나도 다시 초원과 같은 방향을 보며 날씨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려고 애썼다. 곧이어 직원이 테이블 위에 커피와 주스가 담긴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나는 얼음이 빠른 속도로 녹아가는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휘젓다가 트레이 바닥에 깔린 종이를 보았다. 종이 위에 작은 글씨로 무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영어로 된 30가지 질문이었다. 제목은 The New Proust Questionnaire.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19세기 파리 사교계에서는 설문지를 작성하는 것이 하나의 놀이 문화로서 유행이었는데, 프루스트가 젊은 시절 어느 살롱에서 작성한 설문지와 답변이 그 책에 실려 있었다. 이곳은 관광지도 아니고 손님은 한국인밖에 없던데 왜 영어로 적혀 있을까 궁금했지만 한편으로 반가웠다. 갑자기 초원에게 질문할 거리가 30가지나 생겼으니까. 나는 문장을 하나씩 해석해보며 질문을 골랐다. 인생의 모토를 묻는 질문은 시시했고 읽었던 책 중에 가장 나빴던 것을 묻는 건 이 더운 날 화만 돋울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문장을 훑으며 한 줄 한 줄 내려가다가 한 질문에서 멈추었다. If you could only eat one thing for the rest of your life, what would it be?

- 남은 평생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뭘 먹을 거야?

나는 평소 입이 짧은 초원이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초원은 잠시의 고민도 없이 단번에 대답했다.

- 수박.

- 수박은 음식이 아니라 과일이지.

건너편 도로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로 오른쪽에서 나타난 자전거를 탄 행인이 왼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초원은 말이 없었다. 이내 더운 바람이 훅 끼침과 동시에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초원이 지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초원이 말했다.

- one thing을 네 맘대로 음식이라고 해석한 거잖아.

- 그건 여기 적힌 문장이고. 내가 질문한 건 음식이잖아.

- 그래, 그럼 수박 주스.

초원이 포기하듯 말했다. 조금 놀랐다. 첫 번째로 나는 수박을 싫어했고 두 번째로는 초원이 수박 먹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초원이 마시고 있는 노란색 주스를 가리켰다. 초원은 수박이 없어서 오렌지를 마실 뿐이라고 말했다.

그림=조미형 작가

그맘때 나는 써지지 않는 희곡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 희곡은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서울문화재단과 함께 기획한 창작연극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 작품씩 공연하는 페스티벌 형태로 진행되는 작업이었다. 그중 내가 맡은 건 청년 주거지를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 형식의 희곡이었다. 세 작가가 각각 청년 주거지로 대표되는 공간을 하나씩 맡아서 작성하면 되었다. 미리 언니는 대학 때 연극 소모임에서 만난 지인으로, 두어 번 함께 연극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연극계에서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언니는 원래 작업하기로 한 작가 한 명이 건강상의 이유로 하차했다며 내게 급하게 일을 부탁했다. 나는 더 묻지도 않고 하겠다고 말했다. 패션 잡지사에서 반년간 인턴을 끝낸 후 하는 일 없이 지내고 있었다. 인턴은 기사 작성과 관련 없는 잡다한 일만 도맡아야 했고 내게는 종류에 상관없이 어떤 글이든 쓰고 싶다는 갈증이 생겼다. 그러나 희곡의 주제를 알고는 승낙한 것을 바로 후회했다. 내가 써야 하는 공간은 옥탑방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옥탑방이란 공간을 배경으로 쓰이는 픽션은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미리 언니가 고시원을, 다른 작가가 반지하를 맡은 것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이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구나. 모두 빤하고 잘 아는 곳이구나.

청년 주거지를 배경으로―심지어 서울문화재단과 함께하는―희곡을 쓰라고 하니 왠지 청년 주거 문제에 대한 사회의식도 드러나야 할 것 같고… 여러 가지 생각에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노트북을 열고 겨우 몇 줄 적어 보았지만 결국 하루의 끝에는 모든 문장을 완전히 지우고 말았다. 누구나 아는 얘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청년 주거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곳곳에 널렸고 널려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아직도 해마다 서울의 대학가에서는 기숙사 건립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고 집값은 올라만 갔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를 모른다는 게 아니었다. 서울에 가구 수가 줄지 않으면 소용없었다. 서울만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중심이라고 칭하는 서울만 생각하고 서울에만 신경이란 것을 쓰니까, 사람들이 서울로만 오려고 하지. 대한민국 인구가 5천만이라는데, 수도권 인구가 2천만을 넘는답니다. 내가 여기서 아무리 얘기해봤자… 거기까지 생각하자 희곡을 쓸 의욕이 나지 않았다. 미루고 미루었다. 그리고 마감 이틀 전, 초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우리는 따로 만나지 않고 헤어졌다.

그날 집 근처에서 과일 주스 테이크아웃 전문점을 보았다. 매일 지나치던 가게였다. 가게 앞 입간판에 큰 글씨로 여름 한정 수박 주스라고 적혀 있었다. 그 입간판을 가만히 보던 나는 가게로 들어가 수박 주스를 주문했다. 빨간 모자를 쓴 직원이 물었다.

- 당도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 보통 수박 주스처럼 주세요.

잠시 후 직원이 빨간 종이와 함께 분홍색 주스를 내주었다.

- 쿠폰이에요, 다음에 또 오세요.

내게 수박은 설탕을 뿌린 오이 같은 과일이었다. 설탕을 넣었다고 해서 오이를 갈아 만든 주스가 맛있게 느껴질 리 없었다. 더군다나―오래전에―고체로만 먹어본 과일을 갈아 마시는 경험은 두 번 할 것이 못 되었다. 누군가 씹다 만 것을 삼키는 기분이었다. 나는 카운터에 주스를 내려놓았다.

- 시럽 좀 더 넣어주세요.

직원이 미소 지으며 카운터 앞 세워진 작은 아크릴판을 가리켰다.

당 줄이기 캠페인. 주스가 달콤해질수록 당신의 몸은 씁쓸해집니다.

다시는 그 가게에 안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수박 주스를 들고 집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왜? 왜 이걸 평생 먹겠다는 거야, 이게 뭐가 맛있다는 거야 자문하며 주스를 맛보았다. 결국 반도 마시지 못하고 주스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입안에는 역한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집 앞 편의점에 들러 단맛이 강한 술을 여러 병 샀다. 집으로 돌아가서 밤새 과일맥주를 마시며 넷플릭스에서 예전에 보았던 범죄 영화를 여러 편 돌려보았다. 범인이 이미 누구인지 알고 있는 영화들이었다. 예상대로 범인이 밝혀지는 결말을 연달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초원은 매주 토요일 열 시만 되면 티브이 앞에 앉아 있곤 했다. 범인을 알아맞히는 추리 예능 프로그램을 챙겨보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우리가 함께 살던 시절에는 초원이 틀어놓은 티브이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잠이 들곤 했는데 어느 밤에는 유독 집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티브이 안 봐? 나는 잠에서 깨어 물었다. 재미없어. 내 옆에 누운 초원이 토라진 사람처럼 내뱉었다. 왜? 눈을 감은 채로 나는 낮게 웃었다. 내가 범인을 자꾸 맞히거든. 어떻게? 가장 범인이 아닐 것 같은 놈, 그놈이 범인이야. 정말? 모두 범인인 것처럼 단서를 줘놓고 시청자들을 속인다고, 알고 보면 단서가 가장 없는 사람이 범인이라고, 그런 식으로 반전이랍시고 자기를 놀린다고 초원은 말했다. 뭐랄까, 탐정의 마인드가 없어. 사기꾼들이야, 순 엉터리들. 못됐네, 내가 말하고 못됐지, 초원이 말했다. 우리는 나란히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선풍기가 덜거덕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덥다. 내 말에 초원이 일어나 선풍기 다이얼을 강풍으로 돌렸다. 세기는 세졌지만 여전히 미지근하고 갑갑한 바람이 불어왔다.

- 여름 언제 끝나지.

초원은 다시 드러누우며 한숨 쉬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작 오월의 끝이었으니까. 그 말을 듣고 내가 떠올린 건 갑자기 시가 쓰고 싶어졌다며 대학원에 갈 거라던 초원의 말. 고급 독자의 길을 선택하는 건 어때. 이따금 초원이 자신의 시를 보여줄 때면 시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우물거리면서도 기어코 던지곤 했던 나의 말. 나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우리는 동료였을까.

쌉니다, 싸요. 눈을 떴을 때 창문 새로 시끄러운 상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집 근처 있는 시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내가 지난밤 양치를 하고 잤는지 떠올리려 했다. 입안에서 기분 나쁜 냄새가 감돌았기 때문이다. 몸을 뒤척이다 머리맡에 놓인 노트북을 발견했다. 지난밤 영화가 끝난 상태로 화면이 까맣게 켜져 있었다. 입안에서 냄새가 나는 게 아니라 내가 머릿속으로 어떤 냄새를 떠올리고 있는 걸까? 노트북 화면 아래 창 시각은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망했네, 포기하는 마음으로 물을 끓였다.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며 노트북 앞에서 생각나는 대로 손을 놀렸다. 조연출에게 희곡을 보냈을 때는 고작 오후 6시였다.

며칠 후 대학로 어느 골목, 지하에 있는 연습실을 찾았다. 고시원과 반지하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는 어느 정도 연습이 되어 있던 상태였기에 그날 화두는 내가 쓴 옥탑방 배경의 희곡, 「엄지 검지」였다.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엄지는 옥탑에 사는 인물로 곧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다. 서울 출신이어서 굳이 자취가 필요 없지만 5년 전 넷째 동생 약지가 태어난 후 본가를 나왔다. 부모님이 쓰는 방을 제외하면 여분의 방이 2개뿐인 집에서 더 이상 동생들과 방도 음식도 나누기가 싫어졌기 때문이다. 엄지는 쇼핑몰에서 다리 모델을 하며 월세를 충당하고 있다. 그녀의 유일한 낙은 매주 토요일 방영하는 추리 예능 프로그램 시청. 프로그램은 시청자에게 매주 실시간으로 범인을 지목하는 문자를 받고, 그중 범인을 맞힌 1명을 추첨하여 해외여행 항공권을 선물로 준다. 그 1명 안에 드는 것이 엄지의 목표다. 어느 토요일 밤, 둘째 동생 검지가 옥탑으로 찾아온다. 한 손에는 수박을, 한 손에는 캐리어를 든 검지는 대뜸 언니와 같이 살겠다고 통보한다. 엄지는 검지를 쫓아내려 한다. 그러자


검지, 당당히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엄지에게 들이민다.

초음파 사진이다.

 


엄지 (한숨) 너 사고 쳤냐?

검지 내 새끼 아니거든. 인사해. 이름은 보나 마나 소지겠지. 들어간다.

 


엄마의 임신을 알게 된 엄지는 얼떨떨한 표정이다. 검지는 수박과 캐리어를 들고 집으로 들어간다. 배우들이 돌아가며 대사를 읽어갈 때마다 나는 지난날 숙취로 쓰인 일기장이 공론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내 고개는 점점 숙어졌다. 두 사람이 티브이를 보며 누구지, 누가 잘못한 거지, 하고 범인을 추리하는 장면에서는 며칠 전 과일맥주를 들이켜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내 고개는 점점 내려가 이마가 테이블에 닿을 지경이었다. 대본 리딩이 끝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 이 부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연출가가 말한 부분은 두 사람이 수박을 자르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었다. 혼자 사는 엄지는 평소 요리를 하지 않았고, 혼자 먹기 번거롭고 무거운 수박을 옥탑까지 나를 일도 없었다. 당연히 수박을 자를 식칼도 집에 없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수박을 잡고 다른 사람은 과도를 쥔 채 수박을 자르기 위해 애썼다. 그 장면은 검지가 자신의 속내를 고백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두 사람, 부엌에서 가져온 과도로 수박을 자르기 시작한다.

자른다기보다는 쑤시는 행위에 더 가깝다.

 


검지 수박 하나 먹기 참 어렵네.

엄지 그럼 집 나와 사는 게 쉬운 줄 알았어?

검지 어제까지만 해도 수박 한 통 잘라 놓으면 동생들이 게 눈 감추듯 먹어버려서 내 몫이 없었거든. 오늘은 좀 많이 먹으려고 했는데.


사이.

 


검지 언니.

엄지 응.

검지 언니는 내가 엄마 임신 소식 전했을 때 기분이 어땠어?

엄지 (과도로 수박을 자르느라 끙끙대며) 그게 무슨 말이야?

검지 있지, 난 이번에 엄마가 유산하길 바랐어.

 

 

마침내 수박이 쩍 소리를 내며 벌어진다.

 

붉은색이 선명하다. 수박의 표면은 난도질되어 매끄럽지 못하다.

 

연출가는 이 장면에서 큰 톱으로 박을 자르는 흥부네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의도한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흥부네 가족이 몇 명이었는지 기억나지도 않고 단지 내 집에 식칼이 없는 것처럼 엄지의 집에도 식칼이 없으리라 생각해 그런 장면을 쓴 것이었지만, 의도했다고 대답해버렸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 수박을 자르는 장면이 조금 더 지연되었으면 해요.

 

내 제안에 연출가는 그게 바로 내가 하려던 말이야, 박수 소리를 한 번 짝 냈다. 그전까지 나는 「엄지 검지」에 별 애정이 없었다. 그러나 첫 번째 연습에서 사람들이 내 글에 해석을 부여하고 칭찬하는 것을 듣고 나니 어쩌면 내 글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희곡을 꼭 무대에 올리고 싶어졌다.

 

그 후로 대본은 몇 번의 수정을 거쳤다. 두 달 뒤가 공연이었기 때문에 큰 틀은 바뀌지 않고 대개 자잘한 것들을 고쳐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받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수박을 자르는 장면에서 연출가는 수박을 보고 난자를 떠올렸다고 했다. 당연히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적은 장면이었다. 3시간 만에 적은 그 희곡은 내 머릿속에 있는 무의식을 최대한 쥐어짜듯 뽑아낸 결과물이었다. 마감 전날부터 내 머릿속에는 초원과 나눈 마지막 대화가, 수박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수박을 먹은 것뿐이다. 그때 내 질문에 초원이 평생 육회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면 엄지와 검지는 그 장면에서 식당에서 포장해온 육회에 계란 노른자를 풀어서 먹었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유산에 대해 얘기하는 그들의 대화 내용과 육회를 먹는 행위가 어우러져 기이함을 자아낸다고 평가받았을까? 그랬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의문이 든 것은 추후의 일이었고 수화기를 붙잡는 동안은 그 ‘의도’가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수정하겠다고 말했다. 평면적이고 무난한 희곡을 풍성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많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취업을 준비하며 낮에는 자소서를 쓰고 저녁에는 연습실을 찾았다. 그러면서 그때그때 연출가가 원하는 방향대로 대사의 뉘앙스 따위를 수정하였다. 한번은 쉬는 시간을 틈타 엄지를 맡은 배우가 내게 질문을 했다. 엄지는 왜 추리 예능을 즐겨보는 건가요? 범인을 맞혀도 해외항공권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는데요.

 

- 그거 하나 맞히겠다고 매주 티브이를 챙겨보는 게 이해가 안 가서요.

 

그렇게 물어보는 배우의 얼굴은 진지했기에 나 또한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지만 실은 나도 모르는 문제였다.

 

- 아무래도… 탐정의 마인드를 가진 인물이죠.

 

나도 모르게 답하고는 덧붙였다. 뭐든 골똘히 들여다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거예요. 순진하게도. 그렇게 말하고 나자 이상하게도 초원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집안을 나뒹굴던 초원의 시작 노트가. 노트는 소파에 개수대에 매번 다른 곳에 무방비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그걸 보아도 못 본 척했다. 고개를 몇 번 휘젓고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미리 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극본을 두고 감독과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빨간 펜을 들고 극본을 보는 언니의 옆얼굴은 신중해 보였다.

 

공연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연습실을 찾았다. 내가 쓴 희곡을 연습할 때 배우들은 수박이 있다는 가정하에 마임 연기를 했다. 수박을 든 사람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두 팔을 안쪽으로 둥글게 말았다. 연기가 끝난 후 연출가와 스태프, 배우들은 수박 장면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먼저 도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젓가락, 포크로 시작해 망치나 톱 얘기까지 나왔다. 그다음으로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자를까요, 쑤실까요, 찌를까요, 벌릴까요, 의견이 분분했다. 그 의견들은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필요하다는 것. 단단한 초록색 껍질을 가르면 나오는 빨간 과육.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최대한 비주얼적으로 인상적인’ 장면이 나올 수 있게끔 그들은 여러 방법을 구상했다. 나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극에 대해 잘 안다는 자부가 없는 상태에서 내 이해의 부족은 무지라고 여겼고 다소 찝찝한 마음에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공연은 세 작가가 각자 20분씩 배정받아 총 1시간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다. 내 희곡이 첫 순서였다. 장소는 대학로에 위치한 어느 소극장. 스태프가 극장을 찾아준 관객들과 인사했다. 대개 지인들을 초대한 듯했다. 미리 언니 또한 친구들과 가족을 불러 내게 소개시켜주었다. 나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공연 시작 5분이 채 남지 않았을 때도 좌석은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나는 맨 뒷자리에서 생수병을 꼭 쥐고 앉아 있었다.

 

무대의 왼쪽은 초록색 페인트로 칠해진 옥상 마당, 오른쪽은 끈적한 장판이 깔린 옥탑방이었다. 방에는 작은 티브이 앞에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었고, 낡은 선풍기가 덜거덕거리며 돌아갔다. 책과 옷은 더 이상 놓을 공간이 없어 방 구석구석에 쌓여 있었다. 공연은 예상대로 진행됐다. 잠시 후 검지가 수박을 자르러 부엌으로 가고 이내 엄지가 함께 돕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끙끙대며 과도와 젓가락과 포크를 이용해서 수박을 자르려 애썼다.

 

- 언니는 내가 엄마 임신 소식 전했을 때 기분이 어땠어?

 

- 그게 무슨 말이야?

 

- 있지, 난 이번에 엄마가 유산하길 바랐어.

 

그 순간 수박은 쩍 벌어져야 했다. 하지만 벌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일어서서 발로 수박을 밟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을 피하는 건지 발에서 미끄러지는 건지 수박은 쉽게 밟히지 않았다. 수박 하나 먹기 참 어렵네. 그 말을 할 때 검지 혹은 검지를 맡은 배우는 조금 화가 나 보였다. 저것도 연기일까? 검지는 수박을 두 손 높이 들었다.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관객석의 작은 웅성거림. 흰 벽에는 선홍빛 물줄기가 핏자국처럼 흘러내렸다. 그 아래에 조각조각 파편 난 빨간 덩어리들. 두 사람은 기뻐하며 다시 바닥에서 큰 덩어리를 집어들어 흰 벽에 내던졌다. 손으로 수박 속을 파내어 서로를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손끝에서 빨간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나는 저 글을 마감 당일 겨우 3시간 만에 썼고 따라서 저 인물과 극에 대해 잘 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아니 3시간이 아니라 3년 만에 썼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부끄럽다는 것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이 틀어놓은 티브이에서 추리 예능 프로그램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 그들을 궁지로 내몬 범인은 누구인가.

 

무대는 수박 조각이 살점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더러웠다. 나는 점점 더 부끄러워졌다. 여러 사람의 의견에 끄덕거리다가 밀리다가 구석으로 몰린 기분. 내 지정석은 극장 맨 뒷자리.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졌을지도 몰랐다. 차라리 갈 데까지 가라, 누군가 총을 쏘고 연극이 멈추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내가 총을, 쏘지는 못하고 극장을 나왔다. 극장 입구에 크게 걸린 연극제 현수막을 보며 오랫동안 담배를 태웠다. 나는 내가 만든 인물들이 글 밖에서 나와 무대 위에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 부끄러운가. 줏대 없는 타협이 무대에서 발현되는 것이 부끄러운가. 무엇이든, 왜 이제야 부끄러운가. 무언가 후회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후회하고 있는 건지 확실치 않았다. 여름이었고 해가 길었다. 저녁 여덟 시경. 해는 이제야 겨우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옅은 분홍의 하늘이 점점 붉어졌다. 빨리 어두워지고 막이 내리길 바랐다.

 

*

 

사람들은 작년이 재작년보다 덥고 작년보다 올해가 더웠으니 내년 여름이 오기 전에 한국을 떠야겠다고 말했다. 1년이 흘러 또다시 여름이 왔지만 아무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어느 스포츠 브랜드 업체의 마케팅부에 들어갔다. 그 브랜드 회사는 초기에는 인지도가 현저히 낮았으나 한창 뜨고 있는 하이틴 스타를 기용하면서부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연령층 소비자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대학 생활 트렌드를 소개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관리하며 자연스럽게 신발과 모자 등을 노출시키고 몇몇 떠오르는 인플루언서들에게 협찬을 부탁하는 것이 마케팅부의 주 업무였다. 나는 유행하는 말과 문장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트위터와 커뮤니티 사이트를 돌며 매일 새로 생기는 밈을 메모하고 유행이 지난 밈은 메모장에서 지웠다. 내 머릿속에서 단어들은 단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새로운 것과 낡은 것.

 

미리 언니에게 연락이 온 건 뜻밖이었다. 미리 언니는 올해 대학로에서 진행하는 연극제에 오르는 작품 중 하나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나를 초대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나는 1년 전 그날 이후 연극에 대한 흥미가 아예 사라졌다. 극장을 찾지 않았다. 미리 언니와 전화를 끊고 난 후 내일쯤 적당히 핑계를 대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퇴근 후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선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책과 음반을 보았다. 오랜만에 하나씩 꺼내어 보았다. 손댄 지 오래되어 내 물건인데도 낯설었다. 취직 이후 주말에는 내내 잠을 자거나 집안일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미리 언니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연극은 오전에 시작되었다. 1년 만에 다시 찾은 주말 대학로 거리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대형 프랜차이즈 지점을 제외하면 많은 가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작년에 유행하던 로제 떡볶이집와 저가 도넛 가게도 보이지 않았다. 매표소에서 티켓과 함께 받은 프로그램 북에는 작품 설명 및 배우와 스태프에 대한 소개가 짤막하게 나와 있었다. 혹시나 하여 배우 쪽을 살펴보았으나 아는 얼굴은 없었다. 연극 제목 밑에는 하드보일드 추리극이라는 홍보 문구가 적혀 있었다. 무대를 가리던 커튼이 올라가고 배우가 등장했다. 연극은 한 청소년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가 범인을 찾는 듯 진행되더니 결말에 가서는 순수한 청소년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도 아니다, 우리 모두이다, 따위의 결말로 끝이 났다. 연극을 보는 내내 나름의 추리를 하던 나는 어처구니없는 결말에 화가 났다. 화가 난다고 생각하니 이내 그 화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높은 곳 어딘가에서 누군가 3인칭 시점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밝은 조명 속을 부유하는 먼지들이 보였다.

 

연극이 끝나고 미리 언니를 만났다. 나는 언니를 보고 왠지 낡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아마도 티셔츠 때문인 것 같았다. 언니가 입은 티셔츠에는 큼지막하게 브랜드명이 적혀 있었다. 작년에 한창 바이럴 마케팅으로 급성장했다가 추락한 브랜드였다. 이제 유행이 지나 전혀 ‘힙’하지 않은 브랜드. 다른 분들은 안 오셨어요? 내 질문에 언니는 대꾸하지 않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언니가 데려간 곳은 동유럽 음식을 파는 식당이었다. 유럽을 가본 적이 없는 내게는 메뉴판에 적힌 음식 이름이 모두 낯설었다. 언니는 능숙하게 슈니첼과 굴라쉬, 하우스 와인을 주문했다. 곧이어 하얀 접시에 얇은 돈가스와 갈비찜과 비슷한 비주얼을 가진 음식이 담겨 나왔다. 나는 어쩐지 낯선 이름을 가진 음식을 먹기가 두려워 식전 빵을 최대한 느리게 씹어 먹었다. 언니는 식사를 빠르게 하는 편이었다. 내가 딱딱한 호밀빵 한 쪽을 꼭꼭 씹는 동안 슈니첼과 굴라쉬를 모조리 먹어 치우더니 어머, 너 입이 짧구나, 말했다. 후식으로는 익숙한 과일이 나왔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언니가 왜 웃느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 수박이 나와서요.

 

- 수박이 왜?

 

- 동유럽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수박이 나오니까.

 

언니는 고개를 내저었다. 유럽에서도 수박을 즐겨 먹는다고 실제로 여름의 체코 식당에서는 후식으로 수박을 준다고 말했다. 내가 그동안 수박을 동양적인 과일이라고 생각해왔다는 걸 언니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언니는 수박을 싫어한다고, 오이와 냄새가 비슷하다며 두 쪽 모두 먹으라고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수박 두 쪽은 각각 두께가 달랐는데 하나는 집으면 휘어질 정도로 얇았다. 내가 양손에 수박을 한 쪽씩 들고 이것 좀 보세요, 말하자 언니는 어차피 둘 다 네가 먹을 건데 어때, 말했다. 나는 조심스레 수박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익숙한 향이 입안에 퍼졌다.

 

- 난 이제 수박만 보면 네 생각이 나더라.

 

언니가 1년 전의 내 희곡을 언급하며 말했다. 그래요?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언니가 오늘 연극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나는 언니가 말한 이제, 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이제. 지나간 날과 지금과 앞으로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당시에 그저 수박에 대해 생각했고 그래서 내 희곡에도 우연히 수박이 나온 것이다. 그뿐이다. 그런데 언니는 이제 수박을 보면 내 생각이 나구나, 나도 수박에 수박 주스에 집중한 적이 있었지, 집 앞에 있는 과일주스 전문점에 매일같이 찾아가 스탬프에 도장을 받았지, 그랬지, 그랬던 나는 이제, 수박을 보면

 

- 별로였어?

 

- 뭐가요?

 

- 연극 말이야.

 

언니가 미간을 찌푸렸다. 언니는 내가 연극에 특별한 호감을 내비치지 않자 연극의 각 장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은 내가 아닌 언니 자신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 말을 마친 언니는 와인을 몇 모금 마시더니 이번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늘어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맞는 길을 가고 있다는 걸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내게 확인받고 싶어 했다. 나는 언니가 원하는 말을 마음속으로 먼저 쓰고 그 문장을 그대로 읊었다.

 

- 언니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잖아요. 그건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멋진 일이에요.

그림=조미형 작가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시장이 있었다. 예전에는 시장에 아주머니나 아저씨, 노인들만 있었는데 몇 달 전 어느 인기 방송 프로그램에 노출된 뒤로는 젊은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가게 여기저기에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 앞에서 닭강정이나 고로케 따위를 들고 사진 찍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과일 가게 세 군데에서는 모두 수박을 3만 원 정도에 팔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과일 가게에서 상인에게 물었다.

 

- 수박이 왜 이렇게 비싸요?

 

- 들어갈 때니까 그렇지.

 

- 아직 더운데 수박이 벌써 들어가요?

 

- 원래 포도 나올 때 수박 들어가는 거야. 자, 좀 먹어봐. 크고 달아.

 

상인은 크고 붉은 포도알 하나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입에 넣고 씹으니 껍질에서 다디단 과육이 터져 나왔다. 과일의 제철에 대해 빠삭하게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상인에게 어떻게 하면 그런 것을 잘 알 수 있느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답은 빤한 것이었다.

 

포도가 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집 반대편으로 더 걸었다. 갈증이 느껴질 때쯤 처음 보는 카페를 발견했다. 새로 생긴 곳일까? 벽돌로 지어진 카페는 오래된 2층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볼 때는 분명히 창문이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오니 창문이 없었다. 창문을 대신할 것이라곤 벽 한쪽에 붙어 있는 르네 마그리트의 <지는 저녁> 포스터. 나는 그 그림이 잘 보이는 맞은편 자리에 앉아 커피를 기다렸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잠시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커피가 나와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초원이 있었다. 초원은 마지막으로 만난 모습 그대로 흰색 볼캡을 쓰고 있었다. 볼캡을 꾹 눌러쓴 탓인지 눈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파스텔로 문지른 것처럼 새까맣게 가려져 있었다. 얼굴에서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도톰한 입술뿐이었다. 나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지만 머릿속은 초원의 볼캡처럼 새하얬다. 침묵이, 희곡이라면 ‘사이’라고 쓰기도 민망한 긴 침묵이 초원과 나 사이에 이어졌다. 카페 안은 시곗바늘 소리도 직원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야말로 고요. 어떤 대화거리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30가지 영어 질문이 적힌 그 카페의 그 쟁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 수박이 자꾸만 나를 따라다녀.

 

- 그게 무슨 소리야?

 

- 그만 따라다니면 좋겠어.

 

나는 초원의 눈을 바라보며 조금은 결연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했고 초원은 잠시간 생각하는 듯했다. 이내 검정 비닐봉지를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비닐봉지 속을 들여다보였다. 초원은 봉지 속에 손을 넣어 포도 두 알을 떼어냈다. 그중 한 알을 내게 건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초원은 포도 두 알을 티셔츠로 문질러 닦은 후 입안에 넣었다. 초원의 하얀 티셔츠에 작고 동그랗게 보라색 물이 들었다. 그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초원은 포도를 씹으며 말했다.

 

- 여름이어서 그랬던 거야.

 

단지 제철이어서 수박이 자주 보였던 것뿐이야. 너를 따라다닌 적은 없어. 초원은 입에서 포도 껍질을 빼내어 테이블 위에 나란히 올려두었다. 단물이 모두 빠진 껍질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깊이 잠겼고 그때를 떠올렸다.

 

- 평생 한 가지 음식을 먹는다면 뭘 먹을 거야?

 

- 평생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가 있어?

 

- 그야… 가정이지.

 

- 왜 그런 가정을 해?

 

수많은 물음이 시작되었다. 계속 묻고 물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서 끝없이 이야기했다. 나는 이따금 초원 너머를 바라보았다.

 

- 어디를 보고 있어?

 

초원이 물어서 너의 뒤에 있는 포스터를 본다고 답했다. 초원은 내 뒤에는 포스터가 없다며 그 그림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했다. 나는 초원의 뒤에 있는 그림을 보았고 초원은 그런 내 얼굴을 보고 있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그림=조미형 작가

- 짙은 나무색 커튼 사이로 창이 나 있어. 창문 밖으로는 해가 지고 있는데, 누군가 그 창문을 깼어.

 

- 주먹으로? 망치로?

 

-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창은 크게 깨졌고 깨진 유리 조각이 창 아래에 흩어져 있어.

 

나는 그 그림이 초원의 뒤에 붙어 있는 것이 좋았다. 실제 창문 밖이 어떤지 지금 몇 시인지 짐작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집으로 돌아갈 필요 없이 이곳에서 끝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초원은 뒤를 돌아 그림을 살피지 않았다. 대신 아무것도 없는 내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림 속 일몰이 아닌 유리 조각에 대해 말했다. 그 조각은 시간을 정지하고자 한 누군가의 흔적이라고, 정지하고자 했지만 실패한 흔적이라고 말했다. 해는 곧 질 것이라고 말했다. 초원의 말대로 유리 조각에는 해가 지는 풍경이 그대로 그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창밖으로 보이는 저 해는 그림에 불과하므로, 영원히 저물지 않고 저 높이 그대로 저 자리에 있을 것이다. 있을 거라고 내가 말했고 초원은 화가는 어느 한순간을 캔버스 위에 붙잡아 놓을 뿐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고, 작품 속의 시간은 나름대로 흘러가는 거라고, 조금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같은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나는 초원의 뒤를 초원은 나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누군가 본다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림 속 해가 산 너머로 숨어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 이야기하는 동안 시간은 흘렀을 테지만 그림 속 해는 아직 지지 않고 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다시, 계속,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다가오고 멀어져가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수박에 대해.

 

<끝>

◆하가람 “글쓰기의 끈 놓지 않도록 다독여준 모든 분께 감사”

 

아버지는 강처럼 흐르듯이 살라는 의미로 내 이름을 지으셨다. 언젠가 나는 가람이 강이 아닌 다른 뜻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 기사를 읽고 알게 되었다. 그 기사는 가람이 옛 경상도 사투리로 외출복을 가리킨다고 했다. 가람은 크게 상가람, 중가람, 하가람으로 나뉘는데 그중 하가람은 일할 때 입는 옷이라고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나는 이전까지 내 이름에 큰 호감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가람으로 태어났으니 가람이라는 명찰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그 기사를 읽게 된 이후로, 내 이름이 한 벌의 옷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내 이름이 좋아졌다. 언제든 벗을 수 있다는 것, 원하는 대로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방에 새 옷장을 들였다. 지금은 지금의 취향대로 호두색 원목으로 되어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옷장은 표면의 나이테가 변하며 새로운 무늬를 가질 수도, 민트색이나 바이올렛처럼 지금과는 전혀 다른 빛깔을 띨 수도 있다. 옷장은 오랫동안 썩지 않을 예정이며, 옷장 안은 마음먹기에 따라 무수히 넓어진다. 문고리를 잡고 옷장을 연다. 옷장 너머로 흐르는 물.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름다운 강물 앞에 수박이 그려진 티셔츠를 걸어둔다. 딸깍. 옷걸이 걸리는 소리. 나의 첫 번째 작업복이다.

 

멋없는 내 곁에 오래 머물러주는 친구들, 매일매일 내 걱정뿐인 가족에게 고맙다. 다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함께 글을 쓰고 읽어왔던 이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오래전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먼저 손 내밀어준 상희와 정연. 서로의 모든 소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아온 듀오 수빈. 낯선 문장을 탐독하는 아름다움을 함께했던 추영과 은영. 이제는 꿋꿋하게 걸어가라고 다독여준 수연. 누구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소설을 사랑하는 재은과 영강. 매번 멋진 글을 선사하는 민아와 하빈. 자주 휘청거렸지만 이들의 말에 기대어 쉴 수 있었다. 영원한 망망 아율, 온화한 나의 벗 혜선, 혜령, 호수 언니에게도 사랑과 포옹을 보낸다.

 

그리고 이장욱 선생님. 맨 처음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 배짱 있는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모두 선생님의 소설창작입문 수업을 들어서였습니다. 줄곧 두려워하며 쓰겠습니다. 백수린 선생님, 한유주 선생님. 한겨울 벽난로 앞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처럼 저는 종종 대학원에서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듣던 시절에 머뭅니다. 쑥스럽지만 감사한 마음 가득 전하고 싶습니다.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졸업

김화영(왼쪽), 권지예

◆김화영·권지예 “새로운 시선·독창적 사유 펼쳐… 패기 있는 철학적 탐구 돋보여”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12편이었다.

 

‘그동안의 정의’는 인물들의 캐릭터, 대사 등이 자연스럽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이 좋아 재미있게 읽힌다. 그러나 오빠인 윤정수가 사라지고 죽은 이유나 배경 설명이 없고 제목이 약간의 말장난 같은 느낌이어서 아쉬웠다.

 

‘4월의 자리’는 19세에 입양된 딸과 처녀 적에 임신한 아기가 난산으로 죽었다고 믿었던 양모의 친딸을 찾아 어머니의 사후에 처음으로 만난다. 두 딸의 인생에 죽은 어머니의 자리는 무엇이고 어머니에게 딸의 자리는 무엇이었던가. 두 여자의 정체성의 문제와 복잡한 심리를 안정적인 문장과 서사로 큰 결점 없이 매끈하게 풀어나갔다. 수련을 많이 한 노련미가 느껴지나 바로 그 점이 한계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에 비해 ‘수박’은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더운 여름날 친구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는 과일인 수박. 화자의 머리에 계속 떠올라서 수박이 나오는 희곡을 완성하고 연극무대에 올리게 된다. 수박의 상징성이나 의미를 부여하려는 연출가의 의도에 반해 화자에게는 그 당시에 수박을 생각했기에 희곡작품에 우연히 무의식적으로 탄생했을 뿐이다. 이 소설에서 ‘아무것도 아닌’ 여름 한 철의 과일인 수박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독창적인 사유로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쳐내는 작가의 역량에 신뢰가 갔다. 여름이라는 계절과 흐르는 시간과 지루한 삶이 사물들 사이의 숨겨진 유사성을 통해 하나의 형태를 갖추는 작품이 되는 과정을 잘 그려냈다. 르네 마그리트의 ‘지는 저녁’이라는 초현실주의 작품을 말미에 소개하면서 독자들에게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도 좋았다. 기존소설의 고정관념이나 문법을 배반하는 신인의 패기 있는 철학적 탐구가 돋보여서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당선자의 앞날에 큰 격려와 축하의 박수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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