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보통합‘(어린이집·유치원 통합)을 설명하는 기사에서 ‘아이가 한국 나이 5살이 되는 부모는 아이를 유치원과 어린이집 중 어디에 보낼지 고민한다’고 썼습니다. 당시 기사에선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실 최근 많은 부모의 선택지 항목은 ‘둘’이 아닌 ‘셋’입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그리고 소위 말하는 ‘영어유치원’입니다.
10여년 전만 해도 주변에서 영어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습니다. ‘교육열 높은 집’이란 시선도 따라갔죠. 하지만 요즘은 주변에서 영어유치원을 선택한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6살 아이가 있다고 얘기하면 “7살에라도 꼭 보내라”고 조언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영어유치원을 안 보내면 ‘교육에 관심 없는 집’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입니다. 5∼7세 중 실제 영어유치원에 등록하는 아이는 여전히 일부이지만, 부모 중 “영어유치원 고민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저 역시 한때 영어유치원을 심각하게 고민했으니까요.

실제 영어유치원 수는 급증하고 있습니다. 교육부에 따르면 영어유치원은 2017년 474곳에서 2022년 811곳으로 5년간 71.1% 늘었습니다. 저출생 여파로 아동 인구가 줄면서 사립유치원이 5년간 20% 감소하는 등 일반 유치원·어린이집이 줄줄이 폐업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제가 거주 중인 세종시의 경우 영어유치원은 2020년 4곳에서 올해 3월 기준 11곳으로 3배 가까이 늘었는데, 최근 1년여 사이에 생긴 곳만 4곳입니다. 그야말로 ‘폭풍성장세’라 할만합니다.
이렇듯 존재감이 커졌지만 영어유치원은 법적으론 존재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교육부에서 부르는 영어유치원의 정식명칭은 ‘유아 대상 영어학원’입니다. ‘유치원‘은 유아교육법 적용을 받는 교육시설에만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유치원은 단순한 ‘학원’일 뿐이라는 것이 교육부 설명입니다.
교육부는 영어유치원 용어에 매우 예민합니다. “영어유치원 통계를 달라”고 하면 ”영어유치원이 아니라 유아 대상 영어학원”이란 말부터 돌아오죠. 위에서 언급한 통계도 ‘유아 대상 영어학원 중 4시간 이상 교습하는 곳’을 추린 것입니다. 교육부가 영어유치원에 대해 중점적으로 단속하는 부분도 ‘명칭에 유치원이 들어갔는지’ 입니다. 학원이 정부 교육기관으로 오해돼선 안 되니 단어에 예민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편으론 아쉬움이 남습니다. 단어에 예민한 교육부가 정작 ‘교육과정을 유치원처럼 운영하는’ 곳에 대해선 무심한 모습을 보여서입니다. 예를 들어 A학원이 매일 오후 50분 단위 수업을 진행하면서 이름을 ‘○○ 영어유치원’이라 짓고, B학원은 이름에 ‘유치원’은 들어가지 않지만 매일 오전 9시∼ 오후 5시 연속으로 들을 수 있는 수업을 진행한다고 해봅시다. A에 다니는 아이는 잠깐 들러 50분 수업을 듣는 것이 전부고, B에 다니는 아이는 매일 오전 9시∼오후 5시 점심과 간식을 먹으며 학원에 머뭅니다. 반마다 담임교사가 있는 것은 물론, 기관에선 ‘누리과정(어린이집·유치원 공통 교육과정)’에 따라 교육한다고도 설명합니다.

이때 부모들에게 실질적으로 유치원·어린이집의 대체재로 생각되는 곳은 어디일까요? 당연히 B겠죠. 아무리 A가 스스로를 유치원이라 불러도 부모들에게 A는 유치원·어린이집의 보조기관, 학원으로 인식될 뿐입니다. 반면 B가 이름에 유치원과 거리가 먼 단어를 쓰더라도 부모들에게는 유치원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현재 법 체계상 교육부 단속에 걸리는 곳은 A입니다. B는 교습비 신고 등 ‘학원이 해야 할’ 의무를 지키고 유치원 단어만 노골적으로 쓰지 않는다면 큰 제재 없이 영업 확장이 가능합니다. 교육부의 단속이 ‘눈 가리고 아웅’이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영어유치원 존재 자체가 잘못됐다거나 아이를 보내는 것이 잘못이란 얘기는 아닙니다. 교습비가 아무리 비싸든, 어떻게 규제하든 일반 어린이집·유치원 외 기관에 대한 수요는 존재하고, 개인의 선택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영어에 유독 관심이 많거나 외국에서 살다 들어온 경우 등 영어유치원이 필요한 이들도 있습니다.
다만 지금처럼 규제 사각지대에서 폭풍 성장하며 유치원에 갈 아이들을 흡수하는 모습은 문제입니다. 규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것과 규제 자체가 미비해 기관이 확산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교육정책을 관장하는 정부라면 부모 사이에서 ‘영어유치원에 보내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불안감이 공공연하게 퍼지는 것은 막을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불안감은 사회를 좀먹습니다. 단순히 ‘내 돈 내고 내가 다니겠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내버려둘 수준은 이미 지난 것 같습니다.
이런 지적이 이어지자 최근 교육부는 전국 교육청에 ‘유아 대상 영어학원 특별점검’을 요청했습니다. 불법요소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물론, 현장방문을 통해 ’교습과정을 유치원·어린이집처럼 운영하지 않는지’도 점검하라고 당부했죠. 우선 실태를 파악한 뒤 필요한 조치를 검토하겠다는 것인데, 이제라도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미취학 아동의 기관별 교육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2025년부터 어린이집·유치원 체계를 통합한 ‘제3의 유아 교육·보육기관’을 만든다고 약속했습니다. 적어도 ‘유치원이냐, 어린이집이냐’란 고민은 덜어준다는 것이죠. 이번 교육부 점검이 전처럼 ‘유치원이란 용어를 썼는지’, ‘신고한 교습비보다 고액을 받는지’ 정도만 단속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그래서 평범한 부모들의 고민 선택지에서 영어유치원이 조금이라도 희미해지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유치원·어린이집 교육·돌봄 질 상승에도 힘썼으면 합니다. 영어유치원을 선택하는 심리 이면에는 결국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자라고 있을 테니까요. ‘영어유치원이 아닌 일반 유치원·어린이집을 선택했을 때’ 아이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 있게 보여주지 못한다면, 부모들의 고민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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