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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70년간 벼랑 몰린 여성들 비빌 언덕… “100년만 했으면” [나의 삶 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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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5-23 21:26:18 수정 : 2023-05-23 21:2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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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법인 ‘윙’ 최정은 대표

할머니가 3대 복지사업 첫발
일제강점기 日 유학 신여성 할머니
전쟁고아 등 보호 모자사업 시작
여성 직업훈련 전환… 복지법인으로

중간 매개 역할한 아버지
노인복지사업 구상했지만 못 펼쳐
대신 푸드뱅크 사업 열성적 참여
장녀 최 대표에 “함께 하자” 이끌어

변화 모색하는 3대 최정은
성폭력·가정폭력 등 피해 여성들
내면의 힘·경제적 능력 키워줘야
인문학 공부·자활지원센터 집중

원장직 물러나고 ‘쉼표’
실무 내려놓고 사회복지 방향 고민
70년간 거쳐간 여성 4000명 넘어
더 많은 도움 위해 꾸준히 변신 구상

“윙이 한 100년만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30년 안에 우리 사회에서 성매매가 완전히 사라져서 여기에 올 필요가 없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요.”

그는 한때 이곳 자활지원센터에서 생활했던 ‘친구’가 70주년 홍보 동영상 인터뷰에서 했던 이야기를 꺼내서 들려줬다. 이제 40대가 된 그 ‘친구’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딴 뒤 사회복지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최정은 대표는 “대표부터 모범이 돼 먼저 쓰러져야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간다. 조직은 도미노”라며 1953년 할머니 때부터 해 온 여성복지사업을 3대째 하고 있다. 최 대표는 “일이야말로 삶의 척추”라며 일하는 여성 시대를 강조했다. 남제현 선임기자

친구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전날 그 친구의 어머니가 윙으로 편지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고. 돈을 아껴서 모은 100만원을 후원 계좌에 보냈다고. 70주년 잔치하는 데 음료수라도 하라고. 구구한 사연과 함께.

… 우리 아이가 윙을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사춘기 때부터 좋지 않게 빠져서, 저는 안 해본 거 없이 다 해보고 심지어 굿까지 했어요. 그런데 여기 와서 너무 착실하게 변했고, 저와 관계도 좋아졌습니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회복지사 돼 직장도 잘 다니고 있어요. 너무 고맙고 감사합니다. …

사회복지법인 ‘윙(Wing)’의 최정은 대표(57)는 인터뷰 후반부에 올해 70주년이 됐다고 하자, 돌연 친구들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엄마가 감사 편지를 보낸 친구 이야기부터 시작해, 공공근로의 현실을 직면하고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친구, 피부관리 숍 사장이 돼 첫 성공 사례로 회자됐던 친구까지….

 

윙은 1953년 할머니의 ‘데레사 모자원’부터 시작해 70년 동안 벼랑 끝에 내몰렸던 여성 4000여명의 ‘비빌 언덕’이 돼 왔다. 빈곤 여성과 ‘요보호 여성’부터 성폭력과 가정폭력 등 피해 여성,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려는 여성까지.

최 대표와 윙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여성들의 비빌 언덕이 돼 왔을까. 그와 윙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최 대표를 지난 19일 법인 소유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사무실에 위치한 ‘비덕카페’에서 만났다. 삼대의 유장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데.

◆아버지 손에 이끌려 사회복지의 길로

“정은아, 아빠랑 같이하자!”

아버지는 신길동에 소재한 하청 봉제공장을 정리한 뒤 그에게 말했다. 당시 많은 의류 및 섬유 공장이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과 베트남 등으로 대거 이전하면서 아버지 역시 공장을 정리해야 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해 오던 복지법인을 운영하기로 결심했다.

“저는 복지 사업의 큰 비전이나 사명이 있어서 여기에서 일하기 시작한 게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걸 해야지 한 게 결코 아니었어요. 미대를 졸업한 뒤 커리어 우먼, 특히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게 꿈이었지요.”

1997년 3월, 장녀였던 최정은은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할머니가 시작한 복지법인 ‘은성원’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원장으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없던 그는 경비원으로. 이때 그의 나이 31세.

공교롭게도 그날 새벽, 할머니가 사택에서 노환으로 작고했다. 가족들은 장례식을 위해 세브란스 장례식장으로 갔고, 그만 홀로 남아 은성원을 지켰다. 문득 은성원을 처음 열었던 할머니 백수남의 마음이….

1953년 모자보호사업을 시작으로 여성복지사업을 시작한 할머니 백수남(왼쪽 사진·오른쪽)씨. 최정은 대표 제공

◆할머니 백수남, 데레사 모자원으로 복지 사업 첫발

1953년 10월, 할머니 백수남은 신길동 대방역 맞은편에 있는 이곳 땅을 사서 건물을 지은 뒤 데레사 모자원을 설립했다. 데레사는 백수남의 세례명. 3대 복지 사업의 출발이었다. 함경북도 정평에서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난 백수남은 일제강점기 이화학원을 나오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었다.

“할머니는 보통 체격으로 예쁘게 생기셨지만, 당찬 여장부였습니다. 종로에서 양장점을 해 돈을 많이 버셨다고 들었어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윙이 있는 이곳에 터를 잡으셨지요.”

백수남은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아이들이나 그 어머니를 보호하는 모자보호사업을 시작했다. 자비에 후원을 보태서 오갈 데 없는 모자들을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필요하면 교육해 취직까지 시켜 줬다.

“당시에는 국가 지원이 전혀 없었습니다. 할머니 돈으로 땅을 사고 집을 지은 뒤 자선사업을 시작한 것이죠. 미군 부대 사진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 미군 부대의 지원을 좀 받았던 것 같아요.”

백수남은 1966년 데레사 모자원에서 ‘은성직업보도소’로 이름을 바꾸고 여성들을 위한 직업훈련으로 사업을 전환했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지방에서 상경한 여성들을 위해 숙소를 제공하는 한편 이발과 미용, 가정부 교육을 시켰다. 할머니는 1976년 사회복지법인 허가를 받았다.

할머니의 복지사업을 이은 아버지 최주찬(오른쪽)씨의 모습. 최정은 대표 제공

◆뱅크 푸드사업 전력한 아버지 최주찬

최 대표가 아버지 최주찬과 함께 윤락행위등방지법에 의한 선도보호시설로 전환한 은성원에 들어온 뒤 가장 먼저 한 것은 식판 바꾸기였다.

“시설 안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릇이라도 좀 예쁘고 환한 것으로 먹으면 삶이 좀 나아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하얀색 멜라민 식판을 50개 정도 샀지요. 사람들이 너무 좋아했어요.”

최주찬은 노인복지 사업을 구상하면서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도 하는 등 나름 준비했지만 할머니가 오랫동안 원장직을 유지하는 바람에 사업을 제대로 펼쳐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대신 푸드뱅크 사업을 정력적으로 전개했다. 직접 차량을 운전하면서 유통기한이 임박한 음식물을 인수해서 각종 시설이나 빈곤 가정에 나눠줬다.

“아버지는 직접 운전해 수녀원이나 시설들을 다니면서 음식을 배달했어요. 나중에는 서울 광역 푸드뱅크까지 맡아서 했지요.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복지관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푸드뱅크에 무척 열성이었죠.”

◆3대 최정은, 피해 여성에서 일하는 여성 시대로

“아니, 너는 왜 나의 일을 못 하게 하느냐.”

활발한 사업 진행을 위해서 원장직을 물려달라는 그의 요청에, 아버지는 처음 완강히 거부했다. 마침 군산 지역 유흥가에서 화재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며 성매매 여성들이 대거 희생돼 사회적 공분이 일고 있었고, 2004년 성매매 방지법까지 제정되면서 탈성매매 여성 이슈가 급부상했다. 원장으로서 좀 더 적극 대응하고 싶었다.

2005년 최 대표는 마침내 은성원의 신임 원장이 됐다. 모두 새로운 시대에 맞게 여성복지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원장에서 법인 대표로 물러났다. 그의 나이 그때 39세였다.

그는 치유적 글쓰기와 영화 감상을 비롯해 피해 여성들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다. 과감하게 비영리 조직 컨설팅도 실시했다. 조직 컨설팅과 혁신 작업을 차례로 진행했다.

이듬해 조직 컨설팅을 바탕으로 친구들을 대상화하는 복지 용어들을 철폐하는 비전 선포식도 갖기도 했고, 법인 이름도 ‘윙’으로 바꾸었다. 아울러 정원을 매년 5명씩 줄이는 방식으로 쉼터 비중을 줄여나갔다. 대신, ‘일이 삶의 척추’라는 생각으로 친구들이 사회에 나가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특히 친구들과 철학 공부를 시작하는 등 인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꾸준히 이어진 인문학 공부는 이후 윙의 굳건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2007년 친구들이 일하면서 사회에 설 수 있도록 돕는 자활지원센터를 본격적으로 운영했다. 센터 내에서 직접 생산 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일자리 사업으로 직접 카페나 분식집을 운영했다. 4년 뒤 쉼터는 완전히 정리했다.

◆“일은 삶의 척추… 내면의 힘과 경제적 능력이 필요”

2019년, 쉼 없이 달려온 최 대표는 원장직에서 물러났다. 법인 대표 역할만 맡고 있다. 건물 안에 비덕살롱만 운영하고, 내외부의 매장들도 모두 정리했다. 20년 넘게 실무를 이끌어 왔지만, 언제까지 실무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스텝이 필요했다. 법인 역시 70년을 앞두고 있어서 장기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 더구나 성인 여성에 대한 사회복지의 방향과 틀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은 핑계이고, 몇 년 전부터 어떤 감이 오더라고요. 현재 탈성매매 여성 복지 사업이 길을 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새롭게 방향을 찾아야 할 것 같았어요. 결국 친구들이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내면의 힘과 경제적인 능력을 함께 키워 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이 친구들이 일하도록 해야죠. 일이야말로 삶의 척추입니다.”

사무국장에게 자활지원센터장을 물려줬고, 자활지원센터 운영 역시 독자적으로 이뤄지도록 했다. 현재 센터에는 12∼13명의 친구들이 출퇴근하며 천연염색 일을 한다. 하루 6시간, 한 달 150시간 정도. 프로그램에 따라서 운동과 교육도 병행하고 있고, 점심을 함께 먹는다. 외부에서 인턴십으로 나가서 일하는 여성도 여덟 명 정도. 전체적으로 20명 정도가 센터에서 활동하는 셈. 자활지원센터에는 센터장과 사회복지사 4명, 회계 1명 등 모두 6명이 근무 중이다.

윙의 70년은 한국 근현대 여성사가 아로새겨진 시간이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여성복지 사업의 이슈 역시 바뀌었고, 이에 맞춰 숨 가쁘게 달려온 세월이었다. 현재는 성매매 방지법에 따른 자활지원센터를 하고 있다. 1953년부터 2022년까지 윙을 거쳐 갔거나 머무르고 있는 여성들은 모두 4080여명.

―올해 70주년이어서 대표로서 큰 방향성을 제시해야 할 텐데요.

“일단 공간이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다시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서 많은 여성이 여기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으면 좋겠어요. 대상을 조금 넓혔으면 좋겠고요. 되돌아보면, 무엇을 바꾸기 위한 프로그램을 했다기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진도 찍고, 영상을 찍는 그런 활동이 우리를 키웠던 것 같아요.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건축에 대한 야망을 품고 공부 중인데, 세미나실과 책방, 카페, 식당, 극장 등을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 10년 후 모습은 어떨 것 같은지요.

“계속 이러고 있지 않을까요. 생각은 여전히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책을 보고, 세미나를 하고, 잔소리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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