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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대신 입으로… 무한한 자유를 채색하다 [밀착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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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6-04 10:10:44 수정 : 2023-06-04 10: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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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이들에 용기 전하는 구필화가 임경식

인천의 한 아파트 1층 어두컴컴한 복도를 전동 휠체어가 부지런히 움직인다. 104호 문을 들어선다. 문 안은 사방 벽이 그림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그림들은 모두 구필(口筆)화가 임경식(46)씨가 그린 그림이다. 그는 튀김용 꼬치에 미술용 붓을 덧댄 족히 50㎝는 돼 보이는 붓을 입에 물고 상하좌우로 이동하는 전동식 이젤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 입에 붓을 물고 캔버스에 색을 입히고 그렇게 15년째 그림을 그리고 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 아래를 움직일 수 없는 구필화가 임경식씨가 인천에 위치한 자택 겸 작업실에서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임씨의 원래 꿈은 화가가 아니었다고 한다. 체육 교사를 꿈꿨던 1997년 가을 불의의 사고로 인생의 행로가 바뀌었다. 입대를 앞둔 지인의 송별회에 참석한 뒤 귀가하던 길이었다. 오토바이로 커브 길을 지나던 중 불법 주차한 차량을 피하지 못하고 부딪쳤다. 충돌 후 공중으로 붕 뜬 그를 오토바이가 덮쳤다. 병원으로 옮겨져 의식을 되찾았지만 온몸엔 감각이 없었다.

임 화가가 태블릿 PC로 사진을 보며 그림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임 화가가 태블릿 PC로 사진을 보며 그림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의료진은 “목뼈가 부러지면서 중추신경을 건드려 신경이 끊어졌다”는 진단을 내렸다. 꿈 많은 20세 때 교통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됐다. 절망감에 빠져 13년을 방황하며 보냈다. 다시 세상 밖으로 그를 이끈 건 가족의 응원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었다.

 

임 화가의 여섯 번째 전시회 ‘꿈을 꾸다’의 작품들이다. 금붕어가 어항에서 나와 공중을 유영하는 모습 등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

“처음에는 그림에 전혀 소질이 없었던 나를 잘 알기에 그림을 그려 보라는 구필화가들의 권유를 거절했죠. 그런데 부모님이 평생 옆에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자립은 필수였습니다. 망설이는 내가 결심하도록 한 것은 가족이었습니다.”

임 화가가 휴식을 취하며 특수 제작된 물통으로 물을 먹고 있다.
작업을 마친 임 화가의 붓끝이 심하게 훼손돼 있다.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임 화가는 한번 그림을 그리고 나면 붓에 덧댄 나무를 교체한다.

결심했어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처음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리는데 고개랑 턱이 너무 아파 그만둘까 몇 번이나 붓을 집어던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절실한 마음을 다시 다잡곤 했습니다. 끝내는 혼자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고 하루에 8~9시간을 연습했지요.”

인생의 나락에서도 희망의 불빛을 발견했던 당시를 회고했다.

임 화가의 전동 휠체어가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자택 겸 작업실로 향하고 있다.
임 화가가 자신의 장애인 특수 차량에 올라 경기도 안양에 위치한 장애인 미술교육기관 소울음아트센터로 향하고 있다.
집을 나선 임 화가의 전동 휠체어 뒤에 화통이 걸려 있다.
손가락도 움직이기 힘든 임 화가는 어깨 힘으로 전동 휠체어를 조작한다.

“지금은 매주 2회 장애인 미술교육기관 소울음아트센터를 방문해 교육받고 있어요. 장애인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아 이동해야 하고 힘도 들지만 동료들과 이야기도 하고 그림지도도 받으면 예전 유튜브로 혼자 공부하던 때와는 다른 성취감이 다가와요.”

전동식 이젤이 생겨 이제는 큰 사이즈의 그림도 문제없다고 한다.

임씨는 입이나 발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 19명이 모인 한국구족(口足)화가협회 회원이다. 오랜 노력 끝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4년 만에 ‘입으로 그리는 꿈’이라는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얼마 전 여섯 번째 개인전까지 마쳤다. 가장 최근의 전시회 ‘꿈을 꾸다’는 임씨 자신의 심상을 표현한 그림이다. 금붕어가 어항에서 나와 공중을 유영하는 모습 등은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

임씨는 이제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작품을 내보겠다는 목표를 향해 뛰고 있다.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그림으로 용기를 얻고 따뜻해졌으면 하는 게 바람이다. 자신처럼 좌절했던 이들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임 화가의 자택 겸 작업실에 그림 작업 도구들이 정리되어 있다.
구필화가 임경식씨가 자신의 그림 앞에서 붓을 입에 물고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다.

“한때는 저도 죽고 싶었어요. 하지만 죽어도 되는 삶은 없어요. 저도 어항 속을 나오기까지 십수 년이 걸렸어요. 새로운 삶은 반드시 옵니다.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천=글·사진 이재문 기자 mo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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