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8세 여성 납치·성폭행 용의자 체포
대법원 "변호인 조력권 등 제대로 고지 안 해"
美 사법사에 한 획 그은 '미란다 원칙' 수립
미국은 물론 세계 형사사법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일명 ‘미란다 원칙’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조연 역할을 한 전직 경찰관이 얼마 전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전해졌다. 성범죄를 저지른 것이 확실한 용의자를 체포했으나 변호인 선임권 등 기본적 권리에 관해 고지(告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한 비운의 경찰관이었다.

2일(현지시간) AP 통신에 따르면 애리조나주(州) 피닉스의 경찰서장을 지낸 캐롤 쿨리가 지난 5월 29일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피닉스 경찰은 이날 쿨리의 사망 사실을 확인했으나 정확한 원인이나 유족 등 정보에 관해선 함구했다.
쿨리는 1958년 피닉스 경찰서에 들어가 1978년 은퇴할 때까지 20년 동안 근무했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대의 정의감 넘치는 경찰관이던 1963년의 일이다. 그해 3월 13일 쿨리는 18세 여성을 납치한 뒤 성폭행한 혐의로 에르네스토 미란다를 체포했다. 쿨리는 미란다로부터 자백을 받아냈고 이를 친필로 종이에 적게 했다. 1·2심 법원은 미란다의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중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국선변호인이 “미란다가 경찰에 체포될 당시 형사사건 피의자로서 행사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에 관해 제대로 고지를 받지 못했다”는 주장을 펼치며 사건은 연방대법원 상고심까지 갔다. 당시는 미국 사법사상 가장 진보적이었던 얼 워렌 대법원장이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대법관들 역시 진보 성향이 더 우세했다.
국선변호인은 “피의자도 헌법상 권리가 있다”며 “적어도 체포 전에 변호사한테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취지로 변론을 이어갔다. 결국 1966년 대법원은 대법관 5 대 4 의견으로 원심을 깨고 애리조나주를 관할하는 법원으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다수의견은 “미란다는 경찰 심문 도중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았고, 진술거부권도 여러 면에서 효과적으로 보장되지 못했다”며 “피고인이 ‘나의 법적 권리를 충분히 안다’고 기재한 진술서만으로 피고인이 그의 헌법상 권리를 포기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를 흔히 미란다 원칙이라고 부른다.
쿨리를 비롯한 경찰관들은 즉각 반발했다. 그들은 “이런 식이면 앞으로 수사가 불가능해진다”며 “흉악범들이 처벌받지 않고 풀려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란다는 18세 여성 납치·성폭행 혐의에 대해선 무죄가 선고됐으나 별개 혐의가 드러나 바로 석방되진 않았다. 검찰이 미란다 원칙을 충분히 감안해 다시 기소했고, 이번에는 징역 10년형이 확정됐다. 이후 가석방으로 풀려난 미란다는 1976년 2월 피닉스 시내의 한 바에서 다른 손님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흉기에 찔려 숨졌다.

비록 쿨리가 만든 것은 아니나 미란다 원칙은 이후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에서도 형사사법 절차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에겐 할리우드 영화에서 경찰의 피의자 체포 장면마다 등장하는 미란다 경고(Miranda warning)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의 진술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혹시 변호인 선임이 어려우면 국선변호인이 선임될 것입니다.”
쿨리는 미란다 사건 이후에도 피닉스 경찰에 그대로 남아 경찰서장까지 승진했다. 경찰관 은퇴 후에도 애리조나주 공무원으로서 공공안전 부서에서 근무했다. 노년의 쿨리는 피닉스 경찰박물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는데, 미란다 체포 50주년이던 2013년 대중을 상대로 그 사건에 대한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