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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프롤로그 - 유령아빠, 불행의 씨앗

, '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입력 : 2023-09-10 20:08:44 수정 : 2023-10-03 22: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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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을 만난 동갑내기 남자친구가 하루 아침에 안면을 바꿨다. 학교에서 마주쳤는데 그냥 힐끗 쳐다보더니 지나갔고, 전화번호도 차단당했다. 

 

‘뭐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장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이 결국 닥쳐왔음을 깨달았다. 

 

‘나, 버림받았구나.’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기대가 산산히 부서졌다. 하린(28)은 남자가 자신과 곧 태어날 아이, 둘 다 버리고 떠났음을 머리로는 인지했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그에게 이 상황은 도저히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를 회상하는 하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걔(남자)한테도 분명 책임이 있잖아요. 반반이잖아요. 근데 이 ‘반반’이 왜 걔는 쌩 까면 끝인 거고, 저는 혼자서 10개월..이 뭐예요. 그 이상 계속 감내해야 하는 건가요?”

 

최근 5년 사이 혼인하지 않은 상태로 두 번의 나홀로 출산을 한 나정(가명·25)의 경우도 비슷했다. 첫 번째 임신은 당시 같이 일했던 6~7살 연상의 동료 남성, 두 번째는 연인 사이로 동갑인 남성의 아이였다. 

 

아이 아빠는 달랐는데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의 반응은 똑같았다. 자신은 책임 못 지겠으니 아이를 낳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아이를 낳겠다는 결정은 남성들과의 관계 단절로 이어졌다.

 

“첫째는 임신 초기에 알렸고, 둘째는 4~5개월쯤 됐을 때 알렸죠. 둘 다 자긴 모르겠다는 반응이었어요. 저는 낳아서 키울 테니 연락하지 말라고 하고 그냥 ‘아이 아빠는 없는 사람이다’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같이 잘못한 일인데 같이 책임은 안 지려고 해서 처음엔 화가 났죠. 지금은 그런 건 없어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은 미혼부에게도 부담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혼부들은 연락을 끊어버리든지, 입양을 종용하다 여의치 않으면 영원히 잠적한다.

 

-『나는 미혼모다』(물푸레복지재단) 5쪽

 

‘장난해? 이대로 끝낼 순 없어.’ 

 

하린은 남자를 미친듯이 찾아갔다. 끝내 돌아온 남자의 말은 냉랭했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아이도 자신도 그냥 없어졌으면 한다는 의미였다. 이 무렵 하린은 자신에게 심한 우울증이 온 것을 알았다. 남자는 자신이 대학도 가야 하는데 왜 자꾸 이러냐는 식이었다. 아빠로서의 책임이라곤 깃털만큼도 없는, 가볍디 가벼운 상황 인식. 엄마가 된 자신이 느끼는 무게감과는 차원이 너무나 달랐다.

 

“저는 대학 안 가나요? 그리고 솔직히 지금 당장 아기 낳아야 되는데 대학이 문제예요? 고등학교 졸업부터 노답이고 출산은 할 건지 말 건지, 낳은 다음엔 키울지 입양 보낼지 결정해야 되는 상황인데. 당장 병원비도 없어서 그 친구가 주말에라도 아르바이트 뛰어서 저한테 돈 보내줘야 할 판에 그런 건 하나도 안 하면서 말이에요.”

 

분노와 절망, 우울감이 뒤섞인 어둠이 점점 하린을 집어삼켰다. 난생 처음 죽음을 생각했다. 수건으로 목을 졸라본 날도 있었다. 눈앞이 캄캄한가 싶더니 세상이 막 파래졌다. 이렇게 끝인 건가 싶은 순간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죽으면, 부검도 안 하면 그냥 혼자 자살한 사람이고 가족들도 왜 죽었는지 이유를 모를 텐데 그건 너무 억울했다. 

 

‘일단 낳자. 어떻게든 아기를 다른 데 보내고 나서라도 죽자.’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넘겼지만 딱히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나중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됐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나 의지를 품기조차 어려웠다. 

 

이러다 갑자기 학교에서 출산을 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모르겠다. 답이 없다’ 싶었다.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극한의 상황일 거라 생각하니 끔찍했다. 제 몸에서 나온 아기에게 몹쓸짓을 한 ‘비정한 엄마’로 뉴스에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렇다고 뭘 할 수도 없는 벽에 가로막혔다. 이웃끼리도 다 아는 크지 않은 마을에서 병원에 가는 순간 모두에게 소문이 날 것이었다. 이 난관을 헤쳐가기엔 믿을 구석이, 비빌 언덕이 너무 없었다.

 

◆편집자 주: 지난 6월 ‘수원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을 계기로 이뤄진 정부 전수조사 결과, 2015년부터 8년간 출산 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이 2123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 안타깝게 유기되거나 세상을 떠난 아기들의 사연이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세계일보는 영아유기·살해가 개인 일탈이 아닌 ‘사회 문제’라는 인식 아래 판결문을 분석하고, 영아의 생부모 사연을 심층적으로 추적했다. 이를 통해 드러난 영아유기·살해 범죄의 이면, 아동·여성 보호와 복지 시스템의 민낯을 특별기획 시리즈 ‘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연재로 소개한다.

 

<관련 기사>

 

[심층기획 - ‘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프롤로그 - 유령아빠, 불행의 씨앗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0509604

 

①[단독] 애 아빠 없이 ‘나홀로 출산’… “극도의 패닉 상태서 범행”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0508352

 

②‘국가의 부재’ 속에 아기가 떠난 그날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2500544

 

③벼랑 끝 내몰려 ‘아이 버릴 결심’ 하기까지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3500163

 

④아빠가 먼저 ‘두 사람’을 버렸다…부양 점수 5점 만점에 1.3점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3520264

 

⑤“엄마를 보호하는 게 영아 지키는 길”… ‘비정한 모정’ 다시 본 그 판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00252

 

⑥“주민등록 말소, 이사 등 온갖 꼼수”… ‘도망간 아빠’ 찾아 삼만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13897

 

⑦“책임 안 지면 빨간 줄…‘히트앤드런 방지법’, 왜 안 생기나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13915

 

⑧외국인 미혼모와 ‘무등록’ 아동…“아이 성년 되면 생이별”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9510570

 

⑨“가부장적 체류 제도가 ‘투명 아동’ 양산…핏줄·혼인 중심 틀 깨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0510203

 

⑩‘살아남은 유기 영아’ 이야기…원가정도, 새 가정도 없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0512263

 

⑪“누구에게도 기댈 생각을 못해요”… ‘버팀목’ 없이 고립되는 청년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2502617

 

⑫[좌담회] “예기치 않은 임신은 재난상황…생부에게 더 책임 물어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2513086

 

에필로그 - 이중잣대에 지친, 미혼모들의 속마음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4502371


정지혜·윤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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