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관광 중심 싹쓸이 쇼핑 줄고
中 MZ세대, 로컬 체험 수요 늘어
‘가성비’ 화장품·동네식당 등 선호
2023년 CU, 中카드 결제액 106% 증가
면세점 소비는 코로나 이전의 ‘절반’
“체험 상품 강화… 간편 결제 늘려야”
날씨가 오락가락하던 최근 서울의 한 편의점. 중국인 인플루언서와 그의 동료들이 라이브 방송을 하며 들어왔다. 이들은 어색하지 않은 모양새로 편의점 내부와 진열 상품을 촬영했다. 인플루언서의 스마트폰 화면에는 실시간 댓글과 반응이 쏟아졌다. 해당 점포 관리자는 이런 모습은 얼마 전부터 일상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그는 “편의점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고 있는데, 중국에서 온 고객이 유독 많다”고 설명했다.
중국인 관광객의 관광·소비 행태가 달라지고 있다. 이전에는 업체를 끼고 대규모로 정해진 코스로 관광했다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기점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한국인이 실제로 향유하는 삶의 방식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관광객이 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따라 ‘큰손’으로 불리던 중국인 관광객의 면세점 매출은 줄고 있지만, 편의점과 음식점 매출이 증가하는 모양새를 보이기도 했다.
17일 BGF리테일에 따르면 올해 1∼11월 편의점 CU에서 알리페이·위챗페이·유니온페이(은련카드) 등 중국 카드 결제 금액 전년 대비 신장률은 106.4%에 달했다. 같은 기간 전체 해외 결제 이용 건수는 전년 대비 약 1.4배(141.4%) 늘었다. 업체 관계자는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인기 상품 모음을 진열한 특화 매대를 늘리고 중국어 안내문도 부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외국인 관광 1번지’로 불리는 명동 거리에서도 변화가 포착되고 있다. 명동 거리에서 어묵 노점을 운영하는 박정수(33)씨는 “코로나19 이전에는 중국인 관광객은 대부분 단체 형태였는데, 지금은 친구들끼리 소규모로 오는 경우가 많아 4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줄었다”며 “관광객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제는 한국인이 많이 가는 서울의 성수동 혹은 안국동 등지의 예쁜 카페를 찾아다닌다고 한다”고 전했다. 다른 상인도 이런 흐름을 확인해 줬다. 명동에서 문어빵 노점을 운영하는 한두희(52)씨도 “예전에는 명동 거리 입구에 있는 관광경찰 부스에서 버스가 서면 중국인 관광객이 우르르 내렸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강수 명동상인복지회 총무는 “깃발 들고 단체로 30∼40명 다니던 옛날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깃발 관광’ 사라지고… 전체 관광객 줄어
관광 패턴 변화는 현지인의 경험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한국관광공사 관계자는 “세계 곳곳의 많은 관광객들이 SNS에 실시간으로 자기가 가는 곳, 먹는 것을 올리고 있다”며 “현지인처럼 경험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유행이 번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인 인플루언서가 아니더라도 한국에 있는 중국인이 한국에서 경험하는 것을 올리면 그것이 또 중국에 퍼지기도 한다”며 “이는 중국인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중국인 유학생 바이시린(21·백세림)씨도 여가에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카페나 식당을 찾아간다고 했다. 그는 “SNS에서 한국인들이 가는 핫플레이스를 보게 되면 직접 찾아가서 사진을 찍어 올리곤 한다”고 말했다.
중국인의 소비 경향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BC카드 신금융연구소가 발표한 중국 은련카드 소비 데이터 분석 자료를 보면 지난 9월까지 중국인의 소비 행태에서 면세점 비중은 35.9%로 2019년 같은 기간 63.1%보다 절반 가까이 줄었다. 대신 매출액 상위 10개 업종에 없던 편의점이 전체 매출액의 1.5%를 차지하며 매출 9위로 올랐다. 2019년 매출액 0.8%로 10위에 머물렀던 음식점 역시 2.9%로 7위로 순위가 상승했다.
중소 화장품 브랜드 제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점도 눈에 띈다. 화장품 판매 업체 관계자는 “중국인 관광객이 이전에는 면세점에서 브랜드 제품을 주로 샀다면, 이제는 로드숍에서 가성비 좋은 제품을 찾고 있다”며 “상권도 명동 중심에서 압구정 등으로 넓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 이후 회복할 것으로 예상됐던 중국인 관광객 수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달 내놓은 ‘중국인 관광객 회복 지연 원인과 시사점-시나리오별 중국인 관광객 규모 및 경제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방한한 중국인 관광객은 월평균 14만4000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태로 단체관광이 불가했던 2017∼2019년 평균(월 41만6000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올해 12월까지 방한 중국인 관광객은 2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의 일자리전담반 태스크포스(TF)의 ‘중국 방한관광객 현황 및 취업유발효과’를 보면 9월 중국 방한관광객은 26만4000명을 기록, 2019년의 48.8% 수준을 회복했다.
지난 8월 2017년 3월 한한령 이후 6년 반 만에 단체관광이 재개됐지만, 9월 단체관광객은 1만3000명(관광비자 기준)으로 8월 대비 2000명 늘어나는 데 그쳤다. 연구원은 중국인 관광객 회복이 지연되는 이유로 중국의 경제주체들이 느끼는 체감경기가 부진한 점을 꼽았다.
중국인 관광객 유형이 단체 여행객에서 개별 여행객으로 바뀌면서 면세점에 편중했던 소비 패턴도 변화가 일고 있다. 제주도의 BC카드 결제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지난 추석 연휴(9월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6일간 제주를 방문한 중국인 관광객 1인당 하루 평균 소비 액수는 16만원가량으로 추산됐다. 지난해 16만9000원보다 줄었다. 물가 상승분을 감안하면 예전만큼 지갑을 열지 않은 셈이다. 면세점 소비 비중은 지난해 30.88%와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56.34%에 비해 감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개인 취향 반영된 소비문화
중국 대명절인 중추절과 국경절 연휴가 이어져 면세점 업계에서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큰 폭의 매출 반등을 기대했지만 그에 못 미쳤다. 크루즈 관광객의 경우도 저렴한 식품류를 찾고 있다.
윤남호 롯데면세점제주점 부점장은 “경기 부진으로 크루즈 관광객들의 구매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여서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며 “현재 중저가 위주로 중국 관광객 구매 흐름이 변하면서 중저가 상품을 전진 배치하는 등 ‘박리다매’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면세업계는 이 같은 분위기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소비 패턴이 바뀌면서 예전 같은 쇼핑관광을 기대하기 어려워서다. 여행업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전세버스 요금 등 지상비가 크게 올라 수익을 쇼핑관광에 의존해야 하는데 녹록지 않아 단체 여행상품 수익을 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중국 크루즈관광객이 제주에 물밀듯 들어오고 있지만 체류시간이 5∼6시간으로 짧고, 크루즈 내에서도 면세 쇼핑이 가능해 기항지에서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크루즈 등 단체관광객이 늘면서 활기를 되찾고 있지만 회복세는 더디다”며 “중국인 단체관광 재개와 리오프닝 효과는 올해 말까지 기다려봐야 알 것 같다”고 설명했다.
◆“로컬 체험 중심 관광상품 활성화 필요”
K팝과 K드라마, K푸드 등 K콘텐츠가 외국의 젊은층에서 인기를 끌면서 중국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에 출생한 세대)를 중심으로 제주 관광과 소비 흐름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예전엔 중산층 단체 관광객인 ‘유커’와 면세점 대리 구매 보따리상인 ‘다이궁’, 큰손으로 불리는 외국인 카지노 관광객이 주를 이뤘지만 이제는 개별 관광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이들은 면세점보다는 국내 중저가 화장품 매장을 찾고, 음식점도 가성비 좋은 동네 맛집을 찾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가령 제주시 노형동의 한 족발보쌈 전문점과 중국음식점은 20∼30대 중국인 관광객들이 가게 앞에 줄지어 서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진다. 이 중국음식점은 자장면 3000원, 탕수육 7000원으로 다른 음식점보다 절반 이하 가격에 판매한다. 제주시 연동에 있는 중저가화장품 전문매장 고객들은 대부분 MZ세대라 불리는 20~30대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도내 일부 매장은 고객의 80~90%가 중국인이 차지하고 있다.
제주시 원도심에 위치한 제주목 관아에는 최근 한복을 입은 중국인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관덕정 바로 옆에 자리 잡은 한복대여점도 덩달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제주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제주목 관아를 찾은 관람객 수는 5만1150명으로 지난해 2만8498명과 비교해 갑절 가까이 늘었다. 이 중 외국인이 1만1012명으로 21%를 차지했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은 중국인 관광객의 소비 변화로 소상공인들의 맞춤형 전략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MZ세대 주도의 체험 중심 여행 흐름을 반영해 중소·소상공인이 로컬 체험 중심의 관광상품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간편 결제 편의성을 높여 관광객들의 소비를 자극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