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군과 교전 중 사망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의 아내, 실명 후 건물 주차창에서 시신으로 발견
1000만 관객을 훌쩍 뛰어 넘은 영화 ‘서울의 봄’ 흥행 돌풍으로 1979년 12·12 군사 반란(쿠데타)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 세력과 맞섰던 군인들(진압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영화 속에서 정우성이 연기한 이태신 장군만큼의 비중은 아니지만 반란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총상을 당한 특전사령관 공수혁 장군(정만식 분)과 숨진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오진호 소령(정해인 분)도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데, 공수혁과 오진호의 실제 인물이 정병주(1926∼1989) 특전사령관과 김오랑(1944∼1979) 소령이다. 두 사람은 군인 본분을 잊은 반란 세력의 야욕과 오욕의 역사를 부끄럽게 만든 진짜 군인이었지만 본인과 가족들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 등 비극적인 가족사가 이어진다.
학군(ROTC) 출신 특전사 예비역 대위로 ‘김오랑 중령 추모회’를 이끌어 온 김준철씨가 펴낸 김오랑 평전 ‘역사의 하늘에 뜬 별 김오랑’에는 정병주, 김오랑과 관련한 안타까운 사연이 상세히 소개돼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비운의 사령관’으로 기억되는 당시 특전사령관 정병주(육사 9기) 소장은 자신이 끔찍이 아꼈던 부하들의 믿기 힘든 처신에 대해 사태 후 이렇게 분통을 터뜨린다. “부하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하여 반역하거나 피신한 데 대하여 허망함을 느꼈다.”
특전사령관을 5년간 역임했던 정병주는 특전사로 오면서 ‘정규육사’(육군사관학교가 4년제가 된 11기부터 배출된 육사 장교)’ 11기 전두환·노태우·정호용, 12기 박희도·장기오, 13기 최세창 등 예전 공수특전단에서 근무한 경험자들을 상당수 데려왔다.
이 중 12·12쿠데타 당시 제1공수여단장이었던 박희도는 여단장 선발 과정에서 정병주의 도움을 받았다. 1978년 11월 충남 광천 지역에 침투한 3인조 무장공비 소탕작전의 실패로 예편 위기에 놓였을 때도 정병주가 나서 구원해주기도 했다.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은 중령 시절부터 정병주 밑에서 작전참모로 근무하며 대령과 준장 진급 때 큰 도움을 받은 심복 부하나 다름없었다. 제5공수여단장 장기오 역시 동기생 중 마지막으로 준장 진급을 할 때 도와준 정병주에게 충성맹세까지 한 인물이다. 그랬던 이들이 육군 사조직 ‘하나회’를 만든 전두환 주도 쿠데타 세력의 주역으로 활약할 줄은 정병주는 꿈에도 몰랐을 테고 그만큼 충격이 컸다.
두 차례 수술 끝에 회복한 그는 끝까지 12·12 쿠데타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하며 역사의 심판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12·12 쿠데타에 대한 단죄를 언급하기 어려웠던 1987년 11월 한 기자회견에서는 “12·12를 하극상이라고 단정하고 지휘책임을 다 못한 책임에 대해 뼈를 깎는 반성을 해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또 그 무렵 심장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준비를 하고 있던 장태완(영화 속 이태신 모델)에게 편지를 보내 “육신은 자기 의사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역사의 증인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고 그 증언이 끝날 때까지 건강하시라“고 당부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1989년 3월 집을 나간 지 139일 만에 경기도 양주 송추유원지 부근 야산에서 목 맨 사체로 발견됐는데, 63세 였을 때다. 당국은 신병악화와 사업실패 후유증 등으로 인한 비관자살로 처리했다. 하지만 유서 한 장 없이 사망 현장 주변에는 빈 소주병 3개와 종이컵 등이 나뒹굴 뿐 이어서 많은 의문이 생겼다. 더욱이 그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세례명 요아킴)였다는 사실에 ‘자살을 위장한 타살’이란 의혹도 불거졌다. 이 때문에 정병주가 잠든 서울현충원 묘비는 비문이 없는 백비(白碑)의 한이 서려있기도 했다.
앞서 그는 쿠데타 당시 보안사 요원의 감시로 외부 소식을 차단 당해 뒤늦게 김오랑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김오랑이 큰 부상을 당한 줄로만 알았던 그는 이후 부인과 함께 김오랑의 아내 백영옥을 위로하며 돌보기도 했다. 1년에 한두 번씩 김오랑 묘를 찾아서는 “죽기 전에 반드시 12·12 군사반란의 진상을 규명해 관련자들을 처벌하겠다”며 부하의 넋을 위로했다고 한다.
김오랑은 곧바로 현충원에 묻히지 못하고, 시신이 특전사 뒤 야산에 방치돼 있었다는 말도 전한다. 이후 특전사 내에서 장례가 치러지고, 현충원에 임시로 안치됐다가 이듬해 2월28일에서야 안장됐다. 이 과정에서 아내 백영옥은 남편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죽어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운명에 오열하다 쓰러져 실신하기도 했다. 그때의 심한 충격으로 가뜩이나 안 좋았던 시력이 더 악화됐다.
그해 5월 친정 부산으로 내려간 그녀는 시신경 마비 증세가 심해지면서 결국 앞도 못 보게 된다. 하지만 남편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의지로 지역 봉사단체를 이끌었고, 1990년에는 야당(평민당) 총재이던 김대중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백영옥의 노력에 힘입어 그해 1월 30일 국방부는 마침내 10년 만에 김오랑의 중령 진급을 추서했다. 그런데 ‘민원인의 요구’라는 단서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국방부 측이 자발적으로 추진한 것 같지는 않다고 저자 김준철은 해석한다.
백영옥은 그해 12월, 현직 대통령 노태우와 직전 대통령 전두환을 비롯해 최세창, 박종규(김오랑의 육사 23기 선배로 사이가 각별했던 그는 반란 당시 최세창의 명을 받아 전병주 체포에 앞장섰다.)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 제기에 나선다. 이는 신군부를 향한 최초의 법적 대응으로 상징성이 컸다. 그러자 소송을 바라지 않는 세력의 협박과 압력에 시달렸고, 그 여파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끝내 낯선 남자의 감시를 받으며 입원생활을 하던 중 외압을 견디지 못하고 소송할 기회를 놓친다.
이후 다시 헤어날 수 없는 충격과 절망 속으로 굴러떨어진 백영옥은 1991년 6월28일 새벽, 자신의 봉사단체 건물 아래 주차장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경찰은 사체 부검 후 사인을 실족에 의한 추락사로 결론냈다. 유족들은 성인 허리 높이의 난간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는 게 말이 안 되고, 그토록 한이 많은 사람이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자살했을 리도 없다며 의문을 제기했지만 소용없었다. 44살에 남편이 있는 하늘로 간 백영옥의 시신은 화장돼 부산 영락공원 봉안 시설에 안치됐지만 그 후 연고자의 갱신 요청이 없어 무연고자 임시 보관소에 머물렀다. 그러다 2009년 부산시립묘지 외곽 무연고자 묘역 안쪽 터에 뿌려졌다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이 잊혀지고 있다. 김오랑의 베트남전 파병 시기에 주고 받은 위문 편지를 시작으로 애틋한 사랑을 키우며 백년해로를 약속했던 부부가 기구한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한편, 김오랑의 일대기를 다룬 평전(‘역사의 하늘에 뜬 별 김오랑’)은 그의 성장기와 1965년 육사(25기) 입학 후 훌륭한 군인으로 거듭나는 과정, 35세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생생하게 담겼다. 특히 반란군이 정 사령관을 체포하러 특전사령부에 들이닥친 후부터 벌어진 상황을 묘사하는 대목은 영화보다 더 긴박하고 극적으로 다가온다. 이 책을 펼치면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재조명되는 김오랑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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