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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의시대정신] 파리 올림픽 마스코트가 ‘빨간 모자’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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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7-22 23:23:37 수정 : 2024-07-22 23: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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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노예에 빨간모자 씌웠던
고대왕국 프리기아 전통 이어져
서구서 자유 상징으로 자리잡아
갈라진 佛, 평화의 제전 성공을

파리 올림픽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올림픽의 마스코트는 특이하게도 무생물이다. 이름은 프리주.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원뿔형 모자 프리기아를 의인화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만화 ‘개구쟁이 스머프’가 떠오른다. 꼬마 스머프들을 이끄는 지혜로운 할아버지, 파파 스머프가 쓰고 있는 바로 그 빨간 모자다.

 

모자의 기원은 무려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리기아는 기원전 12세기 무렵부터 현재의 튀르키예 중부에 존재했던 고대 왕국의 이름이다. 트로이 전쟁 당시 동맹군을 보낼 만큼 부강한 나라였다.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만든다는 ‘미다스의 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가 프리기아 왕국에서 유래한다. 신화와 역사와 전설이 뒤엉켜 있던 시절이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당시 프리기아에는 해방된 노예에게 빨간 모자를 씌워주는 전통이 있었다. 고대 로마가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자유민이 된 노예는 모자를 장대에 걸어 높이 흔들며 기쁨을 만끽했다. 이후 서구 문화권에서 프리기아 모자는 자유의 상징이 된다. 미국 상원의 공식 인장에도 이 모자가 살포시 놓여 있다. 아르헨티나, 쿠바, 엘살바도르 등 중남미 국가들의 국장과 국기에서도 장대에 걸린 빨간 모자를 찾아볼 수 있다. 자유, 해방, 독립이란 단어에 담긴 온갖 벅찬 감정이 이 작은 모자 하나에 담겨 있다.

 

프랑스인에게 프리기아 모자는 더욱 특별하다. 혁명 당시 시민군들이 쓰면서 혁명의 아이콘이 됐다. 프랑스 사람 셋이 모이면 혁명을 꾀한다는 우스갯말이 있을 정도로 혁명은 프랑스인의 영혼이자 자부심이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대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보자. 시민군을 이끄는 여인의 머리 위로 붉은 프리기아 모자가 보인다. 맨발로 전장을 누비는 이 여인은 ‘자유’의 알레고리다. 프랑스가 선물한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또한 이 여인이 모티브다. 여인의 또 다른 이름은 마리안. 프랑스의 가장 흔한 여자 이름을 땄다. 프리기아 모자를 쓴 마리안은 프랑스의 정신이자 공화국 그 자체다.

 

그림은 흔히 대혁명이라 불리는 1789년 혁명이 아니라, 1830년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폴레옹 실각 후 왕정복고로 즉위한 샤를 10세의 강압 정치에 성난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3일간의 시가전 끝에 왕을 몰아냈고 금지되었던 삼색기를 다시 흔들었다. 삼색기를 든 자유의 여신 옆에는 총을 든 앳된 소년이 서 있다. 소년은 훗날 빅토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의 부랑아, 가브로슈의 모티브가 된다. 바리케이드 사이 두 발의 총탄에 쓰러지던, 소설 혹은 뮤지컬을 보던 이들의 심장을 가장 큰 슬픔으로 저리게 했던 그 어린 소년 말이다. 자욱한 포연 속에서 적군과 아군의 시신을 밟으며 지식인, 노동자, 어린 소년까지 총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건 그들 모두가 꿈꿨던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을 위해서였다.

 

최근 이 그림이 세간에 오르내린 사건이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대선 유세 도중 총격을 입으면서 찍힌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파란 하늘, 휘날리는 성조기를 배경으로 붉은 피를 흘리며, 경호원들을 물리치고 하늘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쥔 트럼프의 모습은 이 낭만주의 회화의 걸작에 비견될 만큼 강렬했다. 영웅적인 구도, 불굴의 의지와 애국심의 극적인 표현이란 점에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인류애의 표상인 마리안 위에 자국 중심주의, 반이민정책을 표방하는 트럼프의 그림자라니, 어딘가 씁쓸하지 않은가.

 

혼돈 속에 프랑스는 최근 총선을 치렀다. 극우 돌풍에 위기를 느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초강수를 던졌고, 반(反)극우연대가 가까스로 승기를 잡았지만 갈등은 미봉 상태다. 프랑스뿐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등도 경제난에 따른 사회 불안과 반이민 정서로 흔들리고 있다. 그 중심에 생각보다 많은 청년이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유로존 위기,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이어 유럽의 전쟁과 난민 사태를 겪으면서 부모 세대보다 더 가난하고 더 팍팍해진 청년 세대의 박탈감이 극단적인 정치 성향으로 분출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프랑스의 트럼프라 불리는 언론인 에리크 제무르는 ‘프랑스의 자살’이라는 도발적인 저서에서 ‘프랑스는 병자(病者)’라고 단언했다. 톨레랑스(tolérance, 관용)의 나라를 자처하던 프랑스에 증오의 목소리가 차오르고 차별의 시선이 서늘하다. 입을 막고 눈을 가리기 전에 무엇이 그런 목소리와 시선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고대로부터 올림픽은 평화의 제전을 의미했다.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토스 등 도시국가로 흩어져 전쟁을 벌이던 이들이 이때만큼은 한 장소에 모여 공통의 가치를 품고 화합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사흘 뒤 막을 올리는 파리 올림픽도 프리주를 마스코트로, 마리안을 엠블럼으로 띄우고 자유, 평등, 박애를 노래하며 17일간의 축제를 펼칠 것이다. 그러나 올림픽 밖의 세상은 여전히 혼돈스럽다. 빨간 프리기아 모자의 의미가 올림픽만의 공허한 울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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