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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될 때가 있다. 나는 개와 함께 느리게 걷는 데다 개가 무언가에 관심을 보이면 실컷 냄새를 맡고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기 때문이다. 개는 운동하는 사람들을 골똘히 바라보기도 하고 풀숲에 숨어 털을 바짝 세우고 있는 고양이를 찾아내기도 한다. 나는 자전거나 킥보드가 다가오진 않는지 주위를 살피며 개를 기다린다. 눈이 닿는 곳마다 배롱나무가 있다. 여름이 되자마자 흐드러지게 핀 자줏빛 꽃은 한 달이 넘도록 질 줄 모른다.

“할아버지는 지우가 좋아서 자꾸 지우네 집에 오는 거야?” 어른들의 저음과 달리 아이 목소리는 크고 짜랑짜랑하다. 돌아보니 이제 네다섯 살쯤 됐을까 싶은 아이가 노인을 따라 부지런히 걷고 있다. 아이의 종종걸음과 노인의 허정대는 걸음이 묘하게 속도가 맞다. “그렇지, 지우가 좋아서 자꾸 가지.” 노인의 말에 아이가 부루퉁해진다. “근데 왜 도로 집에 가?” “집에 안 가면?” “지우네 집에서 아주 살아버리지.” 아이의 독특한 억양 때문에 웃음이 난다. 노인이 뭐라고 답하는지는 들리지 않는다. 어린이집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머멘 노인이 어느 틈에 길 저 끝으로 물러나 있다.

“그래 놓고는 아예 대꾸를 않는 거야.” 잔뜩 약이 오른 목소리로 여자가 말한다. “암말 않고 버티는 거 그거 진짜 속 터지지.” 나란히 걷고 있던 다른 여자가 추임새를 넣는다. 두 사람 모두 노끈으로 겹쳐 묶은 계란 두 판을 들고 있는데, 화를 내며 빠르게 걷는 와중에도 요령 좋게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돈 오백이 장난이야? 이번엔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가.” 여자는 어쩐지 익숙한 대사를 끝으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여기서 오른쪽 들어갑니다!” 단호한 목소리가 길 복판에 화살표처럼 꽂힌다. 최근 자주 눈에 띄는 러닝 크루 중 하나다. 이쪽은 주택가이지만 마침 대학교 앞이고 공원과 제법 긴 산책로가 있어서인지 러닝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모여든다. 그럴듯하게 장비를 갖추고 열을 맞춰 뛰는 크루도 있고 어딘가 주섬주섬 챙겨입은 모습으로 엉성한 균열 속에 뛰는 크루도 있다. 어느 쪽이든 땀이 잔뜩 돋은 얼굴이 맑고 밝다. 지나칠 때 듣게 되는 리더의 목소리도 제각각이다. 왼쪽 길로 바짝 붙습니다. 허리, 허리 세우세요. 나는 덩달아 허리를 바짝 세우고 길 끝에 붙어 걷는다.

산책을 하는 동안 나는 길 이곳저곳에 멈춘다. 봄에는 자목련 아래, 여름에는 배롱나무 아래, 가을에는 모과나무 아래, 겨울에는 헐벗은 가지 아래 아무 데나 머문다. 제각각의 조도와 각도를 가진 햇빛 아래 맨머리를 드러내고 혼자 서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아주 살아버리고 싶어하는 손주와 마주칠 때, 땀을 뚝뚝 흘리는 건강하고 유연한 신체와 마주할 때, 소란한 마음을 서로에게 내뱉고 주워 담는 나란한 어깨를 목격할 때 나는 혼자일 수가 없다. 아무리 호젓한 길을 찾아내도 그 길 끝엔 틀림없이 사람이 있어 산책할 때만큼은 도무지 외로울 틈이 없는 것이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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