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신인상·사이영상 동시 수상 ‘기록’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 시절 ‘스크류볼의 장인’으로 불리며 야구사를 새로 쓴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전 멕시코 국가대표 야구팀 코치가 6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64회 생일이 채 열흘도 안 남았고 선수 시절 그의 소속 팀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첫 시합을 겨우 사흘 앞뒀다는 점에서 팬들의 슬픔이 크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고인을 “야구의 전설”로 규정하며 “미국과 멕시코는 물론 전 세계 수많은 젊은 야구 선수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애도했다.
23일(현지시간) AP 통신 등에 따르면 발렌수엘라는 전날 캘리포니아주(州) LA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인은 생전에 당뇨병을 앓았다. 최근까지도 LA 다저스 경기 스페인어 해설가로 활동했던 고인은 이달 초 건강 악화를 이유로 방송에서 하차했다.
발렌수엘라는 1960년 11월1일 멕시코 북서부 도시 나보호아에서 태어났다. 17세부터 멕시코 야구 리그에서 투수로 뛰다가 LA 다저스 스카우트의 눈에 띄었다. 발렌수엘라의 엄청난 구위, 특히 스크류볼을 던지는 실력에 감탄한 LA 다저스 측은 그를 신인으로 영입하기로 결정한다. 흔히 ‘마구’(魔球)로 불리는 스크류볼은 공이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떨어지며 투수의 팔 방향, 곧 슬라이더의 역방향으로 꺾이는 구종을 뜻한다. 오른손 투수가 오른손 타자에게 던지면 타자의 몸쪽으로 휘는 변화구가 되기 때문에 타자가 공략하기 어렵다.
1980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발렌수엘라는 이듬해인 1981년부터 LA 다저스의 선발 투수 지위를 굳혔다. 그해 192이닝을 던지며 13승 7패, 탈삼진 180개를 기록했다. 발렌수엘라의 맹활약에 힘입어 LA 다저스는 1981년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뉴욕 양키스를 4-2로 꺾고 우승했다. 발렌수엘라 본인은 신인상은 물론 매년 각 리그의 최고 투수에게 수여되는 ‘사이영상’(Cy Young Award)까지 받았다. 신인상과 사이영상을 동시에 수상한 선수는 현재까지도 발렌수엘라가 유일하다.
발렌수엘라는 LA 다저스에서 1990년까지 11시즌을 뛰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빼어난 투구를 선보였으나 이후 구위가 급격히 떨어졌다. 스크류볼을 자주 던지는 것 자체가 투수 건강에 해로운데다 팀의 요구로 너무 많은 경기에 등판하며 몸을 혹사한 탓이 컸다. 1988년 LA 다저스가 7년 만에 다시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쥘 당시 발렌수엘라는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는 신세였다.
결국 1991년 LA 다저스는 발렌수엘라를 전격 방출했다. 이후 그는 애너하임 에인절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등 다른 구단을 전전하다가 37세이던 1997년을 끝으로 메이저리그를 떠났다. 고국인 멕시코로 돌아간 발렌수엘라는 2005년까지 자국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2006년, 2009년,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CC) 당시 멕시코 대표팀의 투수 코치를 맡았다.
발렌수엘라와 LA 다저스의 관계는 한때 냉랭했으나 2000년대 들어 LA 다저스가 스페인어 전용 라디오 야구 중계 해설가 자리를 제안하고 발렌수엘라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화해가 이뤄졌다. LA 다저스는 2023년 2월 발렌수엘라의 선수 시절 등번호 3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함으로써 그를 팀의 레전드로 공식 인정했다.
고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해리스 부통령은 남편 더글러스 엠호프 변호사와 공동으로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나와 남편 모두 발렌수엘라의 경기를 지켜본 기억이 있다”면서 “야구 선수이자 방송 해설가, 또 LA 사람으로서 고인은 미국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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