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 13세기부터 와인 빚은 ‘동유럽 보석 와인산지’/북위 47~50도 포도재배 ‘북방한계선’/최근 기후변화로 돈펠더·프란코프카 등 레드 품종 점점 잘 익어/JS 포인트 1호 와이너리 비노 피터 리시스키 오너 리시스키 방한 단독 인터뷰
살짝 흙내음이 나는 딸기향과 로즈힙. 비온 뒤 숲속을 거닐 때 코끝을 스치는 젖은 잎과 나무껍질향. 입안에서 느껴지는 시트러스와 레드베리, 그리고 오렌지껍질 향까지. 너무 묵직하지 않은 바디감과 신선한 산도, 그리고 비단처럼 부드러운 탄닌은 와인을 자꾸 글라스에 따르게 만들어 버립니다. 시간이 좀 지나 온도가 오르자 피노누아의 섬세함도 살짝 느껴지며 좋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의 뒷모습처럼 아주 긴 여운을 남깁니다. 상당한 고수가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구대륙 와인 산지에 빚는 레드 와인 같군요.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이 와인은 슬로바키아 와인입니다. 슬로베니아도 아니고 슬로바키아 와인이라니! 소비자들에게는 아직 많이 생소한 슬로바키아 와인을 들고 직접 한국을 찾은 비노 피터 리시스키(Vino Peter Lisicky) 오너 피터 리시스키와 함께 13세기부터 와인을 빚은 ‘동유럽의 숨은 보석’ 슬로바키아로 떠납니다.
◆피노누아 품은 돈펠더를 아십니까
프랑스 와인의 심장 보르도와 부르고뉴, 북부 론, 이탈리아 와인의 왕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생산되는 피에몬테. 이들 산지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와인 벨트’로 불리는 북위 45도 주변에 대부분 걸쳐있다는 점입니다. 미국 오리건주는 북위 42∼46도, 더 북쪽인 워싱턴주는 북위 45∼49도입니다. 포도 재배의 북방한계선은 보통 북위 50도라 워싱턴주는 포도 재배지로는 전세계에서 가장 북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슬로바키아도 북위 47~50도로 워싱턴주보다 살짝 높으니 역시 포도재배의 북방한계선입니다.
슬로바키아는 여름과 겨울에 극심한 기온 변화를 보이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띠며 대부분의 포도밭은 따뜻한 남서부를 따라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품종들을 재배합니다. 그런데 최근 슬로바키아를 포함, 포도 재배 북방한계선에 걸친 나라에서 많은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바로 서늘한 기후에 잘 맞는 화이트 품종을 재배하던 와인산지에서 레드 품종이 점점 잘 익는 현상입니다. 이는 기후 온난화 때문입니다. 독일이 대표적입니다. 독일은 거의 내륙이라 식문화 자체가 육류입니다. 하지만 기후 때문에 레드 품종을 재배하기 어려워 육류와 잘 어울리지 않은 화이트 와인이나 달콤한 와인을 더 많이 생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독일의 기온이 점점 온도가 올라가 레드와인 생산 비중이 최근 30년새 10%에서 무려 40%로 껑충 뛰었습니다. 대표 품종은 부르고뉴에 가져온 ‘늦게 익는 피노누아’ 슈페트부르군더(Spatburgunder)로 팔츠와 바덴 등의 산지에서 급격하게 생산량이 늘고 있습니다.
또 하나 품종이 돈펠더(Dornfelder) 입니다. 피노누아가 고기와 먹기는 좀 약한 느낌이라 좀 더 묵직한 품종이 필요했는데 연구소에서 제대로 된 레드 품종 돈펠더를 만들어냅니다. 이 품종은 선선한 기후에서 비교적 빨리 익고 수확량도 많이 나오는데다 숙성도 아주 잘 되는 품종이라 요즘은 돈펠더가 피노누아를 대체하는 상황입니다. 독일은 돈펠더에 미래를 걸었다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 산지인 라인헤센 등에서 돈펠더 생산량을 급격하게 늘리고 있습니다.
돈펠더는 1955년 독일 바인스부르그 포도 품종 연구소에서 아우구스트 헤롤트가 교배를 통해 만들었고 연구소 설립에 기여한 고위 공무원 이마누엘 아우구스트 루트비히 돈펠트를 기념해 품종 이름을 돈펠더로 지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헤롤트가 헬펜슈타이너(Helfensteiner)와 헤롤트레베(Heroldrebe)를 교배해 돈펠더를 만들었는데 헬펜슈타이너 자체도 피노누아 프리코스(프루부르군더)와 스키야바 그로싸(트롤링거)를 교배한 품종이라는 점입니다. 피노누아 프리코스(Pinot Noir Précoce)는 피노누아의 돌연변이로 피노누아보다 빨리 익어 프리코스라는 꼬리표를 달았습니다. 돈펠더에서 살짝 피노누아가 느껴지는 이유랍니다.
◆돈펠더와 프란코프카의 신박한 동거
“슬로바키아도 비슷한 상황이에요. 20~30년전만해도 레드 품종 카베르네 소비뇽, 프란코프카, 돈펠더는 거의 안자랐는데 지금은 지구온난화로 아주 잘 자랍니다. 슬로바키아는 서늘한 기후여서 화이트 와인 생산이 70%를 차지하지만 점점 레드 품종이 많아지는 추세랍니다. 이웃 나라 폴란드도 비슷해요. 과거 와인을 생산할 수 없을 정도로 추웠는데 지금은 기후변화로 본격적인 포도재배를 시작했답니다.”
피터 리시스키는 이처럼 변하는 기후에 맞춰 화이트 와인 대신 돈펠더와 프란코프카(Frankovka) 품종을 섞은 레드와인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블라우프랑키쉬(Blaufrankisch)로 불리는 프란코프카는 탄닌이 풍부하고 강한 스파이시 노트를 지녔습니다. 오스트리아, 체코,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등에서 큰 명성을 얻어 ‘동유럽의 피노누아’로 불립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각각의 포도가 와인의 특징을 결정해요. 돈펠더는 원래 포도 주스를 만들려고 만들어진 품종이에요. 돈펠더의 껍질은 진한 루비색과 과일향의 아로마를 와인에 부여하고 프란코프카는 말린 자두 느낌과 탄닌, 바디감을 와인에 선사합니다. 길게 이어지는 피니시도 프란코프카가 담당하죠.”
◆‘서클링 포인트 1호’ 슬로바키아 와인 탄생
세계적인 와인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은 피터 리시스키 와인 2019 빈티지에 90점을 줬는데 슬로바키아 와인이 서클링 포인트를 얻은 것은 리시스키가 처음입니다. “홍콩에 제임스 서클링이 방문했다는 얘기를 듣고 홍콩 수입사에 전화해서 곧바로 와인을 서클링에게 보내주라고 요청했죠. 수소문 끝에 만다린 오리엔탈의 미슐랭 레스토랑 만바에 와인이 있는 사실을 확인해 서클링에게 보냈어요. 큰 기대는 하지 않았죠. 와인을 시음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는데 한 3개월이 지난 뒤 서클링 포인트 90점을 받았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슬로바키아 시골의 조그만 마을에서 젊은 친구가 만드는 와인이 서클링 포인트를 90점이나 받을 것이라고 과연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눈물이 왈칵 쏟아지군요.” 겸손하게 말했지만 피터 리시스키는 이미 2019년 말부터 홍콩의 유명한 만다린 오리엔탈에 와인을 공급중일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답니다.
피터 리시스키가 서클링을 사로잡은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생산자들은 품종별로 다양한 와인을 만들지만 피터 리시스키는 최고의 돈펠더 와인 단 하나를 만드는데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매년 같은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최고의 포도만 선별해서 소량만 만들고 남은 포도는 주스를 만들어 판매합니다. 소비자가 2~3년 동안 계속 일정한 품질의 와인을 마시면 그 와인에 큰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일관된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피터 리시스키 와인은 투자용으로 구매하는 팬들이 많다는 군요. 영할때도 맛있지만 10년 이상 숙성하면 훨씬 더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사하기 때문이죠.새 빈티지가 나올때마다 이전 빈티지가 30%씩 가격이 뛸 정도랍니다.
한국 음식과도 아주 잘 어울립니다. 수육과 육전을 페어링했는데 생기발랄한 산도가 느끼함을 잘 잡아주고 섬세한 과일향과 부드러운 탄닌이 고기의 감칠맛을 두배로 증폭시킵니다. 피터 리시스키는 모라비노코리아를 통해 한국에 수입되고 있습니다.
◆좋은 여운 남기는 사람 닮은 와인 만들기
피터 리시스키는 3대째 와인을 빚고 있는데 와인으로 생계를 꾸리는 집안이다보니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와인 일을 도와야했습니다. “다섯살때부터 와이너리에 손님이 오면 셀러의 큰 배럴에서 와인을 뽑아 올려서 손님들에게 서브하는 일을 아버지가 시켰어요. 어릴때 너무 일에 시달리다보니 와인 관련 직업은 쳐다보기도 싫더군요. 그래서 대학에선 정치학을 공부했답니다.”
하지만 타고난 ‘와인 DNA’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돌고 돌아서 결국 어느날 와인을 만들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제 인생은 커다란 서클 같아요. 모든 만물은 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죠. 포도가 땅에서 자라 당분을 만들고 이를 알코올로 바꾸고 다시 산으로 바뀌었다가 최종적으로 사람 몸에 들어가 물이 돼버리죠. 패션모델도 해보는 등 다른 일을 하려했는데 결국은 와인으로 돌아왔네요 하하.”
피터 리시스키는 슬로바키아, 러시아 모스크바, 중국 광저우에 거처를 두고 홍콩 투자 이민 관련 비즈니스도 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충분한 수익을 내기에 와인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군요.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고품질 와인을 소량 생산할 수 있는 배경입니다.
“제 입맛에 맞는 와인을 만드는 것을 좋아해요. 목넘김이 실크처럼 아주 부드러운 느낌을 좋아하죠. 너무 헤비하고 센 와인을 많이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좀 더 엘레강스하고 라이트한 스타일을 만들게 됐답니다. 뛰어난 산미, 부드러운 맛, 오래가는 여운이 제 와인의 특징이죠. 특히 와인의 여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요. 한 모금만 마셔도 그 와인을 오래 기억하게 만들기 때문이랍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비슷한 것 같아요. 많은 이들이 대부분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이나를 오래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나도 그 사람과의 관계가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길 바라죠. 그런 좋은 여운을 남기는 와인을 계속 만들어 가려합니다”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holar),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캘리포니아와인전문가 과정 캡스톤(Capstone) 레벨1&2를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selles) 심사위원, 소펙사 코리아 소믈리에 대회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보르도, 부르고뉴, 상파뉴, 루아르, 알자스와 이탈리아, 포르투갈, 호주, 독일, 체코, 스위스, 조지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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