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특수 복장 착용한 점, 핼러윈 축제와 닮아
귀신이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아 태평한 시간을 맞이하고 싶은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공통된 바람이다.
조선시대 섣달그믐날 궁궐에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태평한 신년을 맞이하는 의식인 나례(儺禮)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궁궐에서 출발한 나례는 관청이나 민간에서도 널리 퍼져 갔다. 나례는 섣달그믐날 궁궐이나 관청, 민간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일정한 도구를 가지고 주문을 외면서 귀신을 쫓는 동작을 하는 의식이었다.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고 태평한 신년을 맞이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의식이었다. 구나(驅儺), 나희(儺?), 나례라고 칭해지기도 하였다.
나례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사실을 전하는 첫 기록은 고려 정종(靖宗) 때인 1040년이지만, 실제는 그 이전부터 수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전기에 편찬된 ‘고려사’ 군례(軍禮) 항목에는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라 하여 나례 의식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12월에 대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12세 이상 16세 이하의 사람을 뽑아 진자(?子)로 삼아 이들에게 가면을 씌우고 붉은 고습(袴褶:바지 위에 덧입는 옷)을 입힌다. … 공인(工人)은 22인이며 그중 한 사람은 방상씨(方相氏:악귀를 쫓던 사람)로 황금색 눈이 4개인 가면을 쓰고 곰 가죽을 걸치고 검정 웃옷과 붉은 치마를 입고 오른손에는 창, 왼손에는 방패를 잡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귀신을 쫓기 위하여 다양한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 가면과 특수한 복장을 착용한 점이 주목되는데, 핼러윈 축제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조선시대에 궁중과 지방관청, 그리고 민간에서 거행하던 나례의 모습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용재총화’, ‘동국세시기’ 등의 기록에서 확인이 되고 있다.
‘용재총화’에는 악기를 쫓는 의식인 ‘구나희(驅儺?)’를 기록하고 있는데, “구나에 관한 일은 관상감이 주관하여 섣달그믐 전날 밤에 창덕궁과 창경궁 뜰에서 한다.”고 하여, 관상감에서 주관하고, 창덕궁과 창경궁 뜰에서 행사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어서 “12신은 모두 귀신의 가면을 쓰는데, 예를 들면 자신(子神)은 쥐 모양의 가면을 쓰고, 축신(丑神)은 소 모양의 가면을 쓴다. 또 악공 10여명이 복숭아나무 가지를 들고 이를 따른다. 아이들 수십 명을 뽑아서 붉은 옷과 붉은 두건에 가면을 씌워서 진자로 삼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용재총화’는 조선 성종 때의 학자 성현이 자신이 경험한 사회, 풍속, 생활상을 기록한 저술인데, ‘구나희’가 포함된 것에서 귀신을 쫓는 의식이 당시에 유행했음을 볼 수가 있다.
정조 때의 학자 홍석모가 저술한 ‘동국세시기’ 12월 제석조(除夕條)에는, “대궐 안에서는 제석 전날에 대포를 쏘는데 이를 연종포(年終砲)라고 한다. 화전(火箭)을 쏘고 징과 북을 울리는 것은 곧 대나의 역질 귀신을 쫓는 행사의 유풍이다. 제석과 설날에 폭죽을 터뜨려 귀신을 놀라게 하는 것은 중국의 풍습을 모방한 제도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전통시대에도 새해를 맞아 여러 의식이 진행되었지만, 귀신을 쫓는 나례가 궁궐과 민간에서 진행된 점이 특히 흥미롭다. 귀신과 재앙을 물리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은 소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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