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유럽 간 ‘대서양 동맹’ 위기 봉착 평가
獨 유력 총리 후보 “英·佛과 핵 공유하거나
최소한 핵 방위 적용 확대 등 논의해야”
佛 “핵 방위 논의 제안에 대한 응답” 반색
독일 유력 정당 대표가 영국·프랑스와 협력해 유럽 내 자체 핵 억지력을 갖출 필요성을 언급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에 착수하며 노골적인 ‘러시아 편들기’와 ‘유럽·우크라이나 비난’에 나서자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으로, 미국·유럽의 이른바 ‘대서양 동맹’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신호라는 평가다.
21일(현지시간)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유럽판 등에 따르면 중도 우파 기독민주당(CDU)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대표는 독일 ZDF방송과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더는 (개별 회원국이 공격받으면 동맹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대응한다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집단 방위 약속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며 나토를 통한 미국의 핵 보호 없이도 유럽이 스스로 방어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은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와 함께 나토의 핵 공유 정책에 따라 미국 핵무기를 수용하는 유럽 국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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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츠 대표는 “유럽의 두 핵 강국인 영국, 프랑스와 핵을 공유하거나 최소한 두 나라의 핵 방위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지 논의해야 한다”며 “트럼프 체제에서는 미국을 신뢰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메르츠 대표는 23일 치러진 독일 연방의회 총선을 통해 차기 독일 총리가 될 것으로 유력하게 점쳐지는 인물이다. 그가 이끄는 CDU·기독사회당(CSU) 연합은 전날 발표된 여론조사기관 인자(INSA)의 마지막 조사에서 29.5% 지지율을 얻어 선두 자리를 지켰다.
차기 총리 자리를 사실상 예약한 그의 입에서 나온 발언은 독일의 중대한 전략적 변화를 예고한다고 폴리티코는 짚었다. 전통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해온 CDU는 “유럽연합(EU) 내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프랑스의 유럽 군사 협력 제안, 특히 핵 방어 계획을 오랫동안 반대해왔기 때문이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2007년 핵무기 공유 방안을 모색하는 대화를 시작하자는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기도 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지난해 발간한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 핵탄두는 5580기로 미국(5044기) 없이 프랑스(290기), 영국(225기)만으로 대응하기에 양적인 한계가 있다.
영국의 EU 탈퇴 후 EU 내 유일 핵보유국인 프랑스는 메르츠 대표 발언에 반색했다. 프랑스 하원 국방위원회 소속 장 루이 티에리외 의원은 “메르츠가 미국과의 탈동조화, 즉 미국 핵우산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며 “과거와는 큰 변화”라고 했다. 엘리제궁 관계자도 “프랑스가 2020년 제안한 유럽 핵 방위 논의에 대한 응답”이라며 긍정 평가했다.
영국 의회 국방위원장인 집권 노동당 소속 탠 데시 의원도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구상, 미국의 존재가 (유럽에서) 사라지거나 크게 줄어들 가능성을 고려할 때 지금이야말로 영국이 유럽 대륙 방위를 위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후 가장 큰 유럽 방위 전략 변화가 될 수 있는 ‘독자적 핵 방어 체계’ 구축은 영국과 프랑스 모두에게 민감하고 어려운 주제라는 지적이다. 영국은 기존 나토 체제하에서 유럽 동맹국들에 핵우산을 제공하고 있지만 핵·미사일 프로그램이 미국과 고도로 통합돼 있고, 프랑스는 나토 회원국이면서도 영국과 달리 나토 측에 핵무기 접근권을 허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핵 방위 체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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