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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문틈을 비집고 꼭꼭 숨겨둔 민낯과 대면하다

입력 : 2025-03-10 22:00:00 수정 : 2025-03-10 1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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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인경 개인展 ‘마주한 날들’

도시 전체의 풍경 조망하며 20여년간 주변만 맴돌다
이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잊고있던 기억·경험과 조우
수묵 바탕에 아크릴 채색 ‘동·서양 조화’… 고유色 구축

권인경은 고층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현대 도시 풍경’을 소재 삼아, 장지에 수묵이라는 전통 동양화 기법을 바탕에 깔고 아크릴 물감을 칠하거나 옛 책들을 잘라 화면 곳곳에 붙이는 고서 콜라주로 매력적인 자신만의 형식을 구축한 작가다.

도시 풍경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도시’와 ‘풍경’이 중요해서 그리는 것은 아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도시는 그냥 거기 있었을 뿐인 존재다. 그러나 그에게 ‘도시 풍경’은 자신의 주변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자 도구였다. 메마른 현대사회의 상징인 마천루와 아파트 대단지는 오히려 그에게 ‘인간적인’ 공간으로 작용했다.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기억과 추억을 품고 있는 곳이었다.

‘말을 삼킨 방 1’

어느 날부터 그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도시 전체 모습을 ‘조망’하며 그려내던 그가, 아파트의 한 벽면을 바라보며 세대 한 집 한 집의 풍경을 관찰하고 묘사하기 시작하더니, 이젠 아예 실내 풍경을 담아낸다.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 도시를,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자신처럼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간을 바라보고 관찰하다가, 이제는 그 공간 안으로 직접 들어가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그에게 문을 열어 주었을까. 어떻게 타인의 방에 들어가 그곳을 둘러보고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일까. 권인경이 그처럼 들어가 그려낼 수 있게 된 것은 사실, 자신의 방이기 때문이다. 숨겨둔 이야기들과 맞닥뜨린 곳은 타인의 방이 아닌 자신의 방이었다.

지난 20여년간 도시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풍경화로 풀어내던 작가는 이제 돌고 돌아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바라본다. 도시를 관찰하고, 아파트를 주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방을 들여다보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 했던 것은 결국 자신과 자신 이야기를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권인경의 작업은 화려하지만 어두웠고, 훈훈하지만 차가웠다. 냉철하게 분석된 풍경처럼 느껴졌다. 비로소 생기와 온기가 감돌기 시작한 것은 작품 ‘넘어진 자리’(2021) 이후부터다. 배려하고 양보하고 늘 ‘타인’을 자신보다 먼저 생각하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을, ‘내가 원하는 것’을 앞에 내세우기 시작한 시점이다. 타인들의 공간을 그리고 이야기를 다루던 작가는 이때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 보인다. 주변 맴돌기를 멈추고 자신의 공간 안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간다.

‘나와의 이야기 1’

권인경은 2년 전 열었던 개인전 ‘열린 방’(An Open Room, 갤러리밈 엠보이드)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어릴 적 상처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동생의 이야기를 꺼내 보였다. 작가의 개인사를 털어놓는 것은 작품 이해에 효과적이고 용이하지만 때로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보는 이들이 ‘상처’에만 집중한 채 이해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인경은 그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그는 조금 열린 문을 비집고 동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동생의 방이 아닌 자신의 방을 마주하게 된다. 문을 걸어 잠그고 방 안에 갇혀 있는 이는 동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자신도 자기만의 방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있었다.

“밖에 있었지만, 나는 나의 방에 갇혀 있었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터져 나오고, 꼭꼭 숨겨두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부정적인 것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게 내가 겪은 것들, 나를 만든 것들과 마주하고, 두려워했던 것들에 맞서고, 그래서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 진짜 나를 위한 하루하루를 살게 됐다. 행복한 하루하루가 펼쳐진다. ‘마주한 날들’ 시리즈는 그 어느 때의 작품들보다도 다채롭고 화사하다. 조화롭고 전통적이면서 감각적으로 세련되었다.”

‘마주한 날 2’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스스로를 마주하는 것이 권인경에게 이처럼 생기 넘치고 희망찬 일이었던가. 작업이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새삼 신비롭다. 그가 오랫동안 갈망하고 추구해 온 진경(眞景)이 이런 것이었을까.

개인전 ‘마주한 날들’은 작가가 담담하게, 마침내 스스로와 마주하는 자리다. 자신과 대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작가는 “나의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감추어 두었던 나의 민낯과 모든 사소한 것들에 오롯이 집중할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라며 “개인의 방은 이곳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전시장에서 당당하고 용감하게 스스로의 민낯과 마주한다. 동시에 관람객에게도 자신의 민낯을 드러낸다.

권인경의 개인전이 23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동 도로시살롱에서 ‘마주한 날들’이란 주제를 내걸고 관객들과 만난다. ‘열린 방’에 이어, 개인의 공간에 좀 더 깊숙이 들어가 그 공간이 담고 있는 각자의 경험과 기억, 그 경험과 기억이 상기시키는 심리적 상황에 대해 더욱 섬세하게 표현한 ‘방(공간)’을 내보이는 자리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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